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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죽이기 (1)

대를 위한 소의 희생 (aka. '나만 아니면 돼')

by Outis

주의: 이 이야기는 정말 그야말로 아무 헛소리도 올려도 된다는 '살롱 드 아무말'의 취지를 충실히 실천하고 있으므로, 읽으실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신들의 명을 어기고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와, 불을 받고 기고만장해질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제우스는 '판도라'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아내로 선물한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어떤 '상자' 하나를 주며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모든 것은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있는 그의 계략이었으니..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판도라는 금기를 깨고 상자를 열고 말았고, 상자에서는 온갖 재앙과 고난들이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상자 뚜껑을 닫았을 때, 남아 있는 것은 '희망'뿐이었다.


희망. 그것은 과연 제우스가 인간을 위해 남겨둔 일말의 자비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저주였을까.






??: 어서 오세요, 게스트 여러분.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호스트 역할을 맡은 '이야기꾼'입니다.


??: 불러서 오기는 왔는데, 여기가 어디죠?


이야기꾼: 이곳은 제가 만든 이야기 속입니다. 여러분을 한데 모으려면 이 방법이 제일 효율적이어서요.


??: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용건이 뭐지?


(쿠구구궁! 포기해라! 멸망해라!)


이야기꾼: 저 소리가 들리시죠? 이미 알고 계시는 대로 우리는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저 목소리에, 심연에 삼켜지고 말 거예요.


??: 아, 그럼 다 같이 힘을 모아 저 어둠을 몰아내자고 우릴 한 자리에 모은 거군요?


이야기꾼: 요는 그렇습니다만, 오늘 모인 목적은 살짝 결이 다릅니다.


??: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이야기꾼: 좋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엔 어떤가요. 우리가 쉽게 뭉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게스트들: (두리번두리번) 어렵지 않을까...


이야기꾼: 그렇습니다. 일단 수가 너무 많고, 서로 상충되는 인격들도 있지요. 그래서 여러분께 한 가지 고육지책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바로 '인격 죽이기', 이른바 우리끼리의 <배틀 로얄(Battle Royale)>입니다.


??: 배틀 로얄?! 하아, 하아...(발그레) 완전 좋아...


??: 배틀 로얄? 똘똘 뭉쳐도 모자란 판에 서로 싸우고 죽이자고요?


이야기꾼: 오해의 소지가 있었군요. 아무나 막 죽이자는 게 아닙니다. 서로의 필요성과 잠재력을 한번 솔직하게 따져보자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어둠과 맞서는데 발목을 잡는 인격을 지우고 도움이 될 인격들만, 정예들만 남기는 겁니다.


??: 아하, 이해했어. 영화 <아이덴티티> 같은 거구나. 난 찬성.


??: 잠시만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 필요성이나 잠재력 같은 걸 우리끼리 어떻게 검증하죠? 게다가 일괄적으로 수치화된 것도 아닌데, 비교를 어떻게 해요? 적정 인원수는 또 누가 정하죠?


이야기꾼: 염려하시는 점 충분히 이해합니다. 생전 처음 시도해 보는 것이니까요. 지운 인격을 되돌릴 수도 없으니 리스크도 있고, 고로 한 번에 다 끝낼 일은 아니지요. 따라서 오늘은 실험적으로 딱 한 명, 한 인격만 골라 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스트들: (웅성웅성. 그럼 나만 아니면 된다는 거네?)


이야기꾼: 형식은 토론, 일종의 썰전으로 진행될 겁니다. 한 명씩 호명되면 나머지가 그의 쓸모와 가치를 검토하는 거죠. 지명된 이는 언제든지 자기변호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어때요, 간단하죠? 질문 있으신가요? 네, 거기.


??: 근데 왜 당신이 진행자야? 그리고 진행자는 무슨 특권이라도 갖나?


이야기꾼: 일단 제가 진행자인 이유는 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 다름 아닌 저이고(??: 그저 자기 이야기에 우릴 써먹는 거뿐이잖아.), 크흠! 이런 가상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저뿐이기 때문이죠. 진행자의 특권은... 딱히 없습니다. 다만 제가 이 공간의 주인이므로 여기서 제 말은 절대적이라는 정도?


게스트 전원: 그런 게 어딨어?! 완전 불공평하잖아!!


이야기꾼: 자자, 절 믿으세요. 공정성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 그럼 시작할까요? 영광스러운 첫 번째 타자는 '세상에 대한 삐뚤어진 시선을 거침없이 입에 담는 냉소주의자', 이하 '시니컬'입니다.


시니컬: 왜 내가 1 빠인 건데?


이야기꾼: 그야, 하하, 제일 문제점이 두드러지니까요. 계속 부정적인 생각과 전망만 내놓는 게 지겹지 않습니까. 요새 너무 나대는 면도 있고요.


시니컬: 아하~ 이야기에 써먹을 만큼 써먹으셨다?


이야기꾼: 크흠!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머지: 확실히 좀.. (웅성웅성) 어둠과 비슷한 부분이 있지. 제거하는 편이 안전할지도?


시니컬: 하! 이것들 봐라? 지금까지 너네가 호구될 뻔한 걸 구해준 게 누군지 몰라? 나 아니었으면 너넨 이용만 당하고 남 좋은 일만 허벌나게 하다가 진작 자괴감에 생을 마감했을걸?


나머지: 으, 으음...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해.


이야기꾼: 그럼 일단 시니컬은 보류하도록 하고(아까비)... 다음은 사회생활 전반을 담당했던, 일명 '커리어'.


커리어: 제가 뭐 잘못된 점이라도 있나요?


이야기꾼: 잘못됐다기 보단, 오히려 쓸모가 많은데 최근 몇 년간 활동이 아예 없어서요. 당신이 좀 더 활약을 하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인간'의 자존감이 올라가지 않을까요? 그럼 어둠을 몰아내는데 도움이 될 거 같은데.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 공간이 놓인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당신 덕분일 거예요.


시니컬: 그렇지. 말이야 바른말로, 브런치 운영팀은 저 이야기꾼의 영양가도 뭣도 없는 이야기를 원했던 게 아니라 커리어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거라고.


이야기꾼: ... (저 놈은 반드시, 내 반드시 없애리라.)


커리어: 그럴지도 모르지만, 제가 한 일이 별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성과도 없어서요. 제 상황도 그렇게 일반적인 것도 아니었고, 뭣보다 다 운이 좋았어서...


시니컬: 아니, 꼭 당신 이야기를 쓰라는 게 아니라 이제 슬슬 경제활동을 재개하라고.


커리어: .......


이야기꾼: 왜 그러시죠? 뭐가 마음에 걸립니까?


커리어: ... 영어.


이야기꾼: 예?


커리어: 난 영어가 싫어욧!! 밖에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알아요?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더 열심히, 훨씬 일을 잘해도 언어장벽 때문에 그만큼 인정을 못 받는다고요! 당신들이 그 좌절감을 아냐고요!


시니컬: 뭐 이런.. 그럼 영어 공부를 하면 되잖아. 쉬는 동안 뭐 했어?


커리어: 그건, 그건... 난 태생적으로 영어가 안 맞는단 말이에요.


시니컬: 뭔 헛소리야. 태생적으로 언어가 안 맞는 게 어딨어? 그럼, 태생적으로 영어가 안 맞는데 영어권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데?


커리어: 으윽... 그래요, 아까는 과장이 좀 심했어요. 변명인 것도 알아요. 하지만! 우리에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요.


이야기꾼: 그게 뭐죠?


커리어: 바로 '저자'예요!


오타쿠: 왜, 왜 나를 가리키냐능?!!




<계속.>


(어쩌면 이게 끝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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