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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램프 외전 - 눈과 케이크 (2)

by Outis

전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므로, 1편부터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https://brunch.co.kr/@mkchoi2021/196


이 이야기는 마봉 드 포레 작가님과 함께 만든 공동작품이며, 여기에 실린 모든 이미지는 마봉 작가님께서 직접 AI를 사용하여 만드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짤랑~

OO카페에 도착한 나는 안을 두리번거렸다. 저 안쪽에서 누군가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예상대로, 지니였다. 그것도 다크네이비 캐시미어 롱코트로 한껏 멋을 부리고 온.


“야아~ 잘 찾아왔네?”


“여긴 왜 온 거야? 일하는 사람은 또 왜 불러내?”


“아침에 말했잖아. 오늘은 여유롭게 보낼 거라고. 내가 말이지, 작년 이맘때는 엄청 바빴잖냐. ‘누구’때문에.”


“... 그래서?”


“그래서 올해는 나도 연말 분위기 좀 즐기려고. 듣자 하니 인간들은 카페에서 커피랑 케이크를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며?”


“다 그런 건 아닌데.”


“난 그러고 싶거든.”


“그럼 먹고 가. 난 이만.”


“야야야, 나같이 잘 생긴 남자가 혼자 있으면 여자들이 그냥 두겠냐? 지금도 봐라, 다들 말 걸 기회만 엿보고 있잖아. 난 여유롭~게 즐기고 싶다고.”


“아 그래서, 어쩌라고?”


“너도 먹어. 돈은 내가 낼게.”


그러겠다 대답도 안 했는데 지니가 성큼성큼 케이크 진열대로 걸어갔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라갔다. 딱히 일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뭣보다 저 황소고집을 꺾느라 소란을 피우느니 빨리 원하는 걸 해주고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지니가 메뉴판을 훑어보며 물었다.


“뭐 마실래? 난 아아.”


“추운데 아이스? 너도 얼죽아야?”


“하, 순수한 화염으로 만들어진 내가 이깟 추위에 얼어 죽겠냐?”


“아, 네네... 그럼 나는.. 토피넛라테.”


“토피? 그거 단 거 아냐? 케이크 먹어야 되는데 단 걸 왜 마셔.”


“난 케이크 안 먹어. 너나 먹어.”


“... 왜?”


“안 좋아해.”


지니가 못마땅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날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중얼거리더니, 여자인 점원을 보자마자 싹 표정을 바꾸어 느끼하게 웃으며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토피넛라테 하나, 그리고 조각 케이크 두 개요.”


“두 개? 나 안 먹는다니까.”


“둘 다 내가 먹을 거거든? 케이크는 딸기 프레지에랑... 그렇지, 가나슈 레이어로 주세요.”


‘가나슈?’


그 이름을 듣자마자 저절로 눈이 케이크 진열대로 향했다. 점원의 손에 들려 나온 가나슈 케이크는 어릴 적 내가 골랐던 케이크와 매우 비슷했다.


“뭘 멍 때리고 있어? 가자.”


정신을 차려보니 지니가 어느새 나온 커피와 케이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어... 가.”


우리는 마침 비어 있는 창가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내 앞에 토피넛라테를 놓으며 지니가 물었다.


“진짜 케이크 안 먹어?”


“응.”


나는 일부러 창밖만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 나더러 들으라는 것처럼 지니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음~ 딸기가 아주 싱싱하네. 크림도 느끼하지 않고. 빵도 너무 흐물거리지 않으면서 딱 적당해. 이렇게 맛있는 걸 안 먹는 놈이 있다니, 어떤 바보인지 모르겠네?”


“......”


“그렇게 달지도 않구만~ 토피 뭐시기랑 먹어도 괜찮겠는데?”


“... 너 왜 자꾸 강요해?”


“뭘?”


“케이크.”


“강요한 적 없는데? 먹지 마. 덕분에 많이 먹으면 나야 좋지~”


그럼 입 다물고 먹기나 하라고 한 소리 하려던 그때, 누군가 탄성을 질렀다.


“눈 온다! 첫눈이야!”


결국 내리는구나.

나는 고까운 눈으로 제법 굵은 눈발을 쳐다보았다. 얼음조각. 다 뾰족한 얼음조각에 지나지 않는데 대체 뭐가 좋다고.

그러다 문득, 거슬리던 포크질 소리가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아름답다... 매번 볼 때마다 신기해.”


지니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더운 사막에서 왔댔지. 신기해할 만하다고 머리로는 이해를 하겠는데, 정작 말은 그렇게 안 나왔다.


“뭐가 신기해? 그냥 비 대신 내리는 얼음 알갱이야. 땅에 떨어진 순간 흙먼지랑 엉켜서 지저분해지고, 길만 미끄럽게 만들 뿐이지.”


지니가 입을 삐죽거리며 쪽 소리가 나도록 커피를 빨아 마셨다.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앉은 컵 안에서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너는, 남이 감동하고 있는데 꼭 그렇게 초를 쳐야겠냐?”


“사실이잖아. 눈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라 뭐든 다 똑같아. 누구 눈에는 그저 좋아 보이는 게 누군가에게는.. 싫은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허, 그런 사정을 일일이 다 알아줘야 해? 그랬다간 좋아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겠다. 나한테 좋으면 그만이지.”


그러시겠지, 하고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그래. 너같이 영원을 사는 녀석이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 인간이 얼마나 쉽게...”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커피잔을 입에 갖다 대었다. 두툼하고 둥그스름한 가장자리가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지니가 눈을 위아래로 굴리며 재촉했다.


“쉽게, 뭐?”


탁. 커피잔 바닥이 신경질적으로 잔받침을 때렸다.


“너랑 달라서, 인간은 그깟 눈 좀 내렸다고 죽기도 한다고.”


아니란 거 안다.

조금이야 영향이 있었을진 몰라도, 아빠가 돌아가신 건 눈 때문이 아니다. 내가 떼를 쓰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시간 그 자리에 안 계셨더라면, 아빠는 아직 살아계실지도 모른다.

다 내 탓이란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만... 너무 평온하게 내리던 그 눈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걸 덮어버리려 하던 그 광경이 잊히질 않아서.

싫다.


지니가 포크를 집어 들었다. 포크 끝이 가나슈 케이크 위에 얹힌 생크림으로 향했다. 크림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포크 위로 떠올려졌다.


“안 좋아해도 돼.”


생크림을 입에 넣으며 지니가 말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어. 나쁜 기억도 없어지지 않아. 싫은 건 싫은 거야.”


나는 묵묵히 가나슈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앞에서 자조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라고, 훗, 없겠냐. 너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 싫은 것도 더 많지 않겠어? 게다가 네 지론대로라면, 나한텐 결국 싫은 것만 남게 되겠지...”


저 말꼬리를 삼킨 것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헷갈려서 고개를 들었다. 상념에 젖은 표정과 허공에서 길을 잃은 포크. 유독 그에게만 시간이 멈춘 듯 보였다.


1765674720358.png 눈 내리는 날, 카페 창가 자리. 각자의 아픈 과거를 간직한 둘.


- 죄의 대가를 치르는 중입니다.


그가 2천 년 동안 램프 속에 갇혀 있었던 사연에 대해 나는 끝내 자세히 묻지 못했다. 무한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는데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얼마나 많았을까, 싶어서.

감정에 치우쳐서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말했나..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 포크가 케이크를 향해 까딱까딱 움직였다.


“그래서 나 나름, 조금이라도 덜 괴롭게 살 방법을 강구해 봤거든.”


“그게 뭔데?”


“덮기.”


“덮기?”


“가리는 거지. 쓰디쓴 커피와 코코아에 크림과 설탕을 더하는 것처럼.”


“... 이 토피넛라테나 초콜릿같이?”


“어. 싫은 기억에 좋은 경험을 더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 충분히 쌓이면 예전만큼 괴롭지 않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새 제법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밋밋한 가로등, 먼지를 닮은 회색과 저마다 잘났다고 떠드는 네온사인 불빛들.

도시가 하얀색으로 덮여갔다.


“아, 배불러. 더는 못 먹겠다. 이건 싸가야지.”


크림 말고는 손도 안 댄 가나슈 케이크를 상자에 넣으며 지니가 덧붙였다.


“너도 너무 늦게까지 있지는 마. 생일인데 일만 해서야 되겠어?”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거 꺼낼 때 신분증에서 봤지.”


어째 눈에 많이 익은 신용카드가 지니의 코트 안주머니에서 나왔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내용물을 확인했다. 과연. 카드 하나가 빠져 있었다.


“그럼... 이거 다 내 돈으로 산 거였단 말이야? 네가 낸다며!”


“난 ‘돈을 내겠다’고 했지, 누구 돈이라고는 안 했다.”


이런 뻔뻔한.. 완전 도둑놈 아냐?


“케이크 내놔. 억울해서라도 내가 먹어야겠어.”


“그래라.”


지니가 환하게 웃으며 순순히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저러니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저 표정, 뭔가 즐거워 보이는데? 몰래 독이라도 넣었나?’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쫓아낼 수도 없으면서 나는 괜히 하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번거롭게 들고 다녀야 하는 케이크 상자와 남은 커피를 담아 온 일회용 종이컵, 눈을 뿌려대는 하늘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싫었다.

싫은데.


1765674720121.png


“그럼 이따가 집에서 보자.”


“... 잠깐만.”


돌아서려는 지니를 불러 세웠다.


“우리 회사 로비에서 기다릴래? 컴퓨터만 끄고 나올게.”


“어? 갑자기?... 집에 밥 없는데.”


“내가 사줄게.”


“오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금세 마음이 변하려고 하지만.


이 케이크 상자 손잡이, 느낌이 나쁘지 않으니까.






잔잔히 내리는 눈의 느낌과 함께 잠시 더 머물다 가실 분들께..


Ryuichi Sakamoto - Merry Christmas Mr. Lawrence

https://www.youtube.com/watch?v=ELJf83TelA0&list=RDELJf83TelA0&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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