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요술램프 외전 - 눈과 케이크 (1)

by Outis

이 이야기는 얼마 전에 완결된 '요술램프' 시리즈의 후속편으로, 마봉 드 포레 작가님과 함께 만든 공동작품입니다. 본편 스토리를 모르셔도 내용을 이해하시는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여기에 실린 모든 이미지는 마봉 드 포레 작가님께서 직접(와우!!) AI를 사용하여 만드신 작품입니다. 나날이 AI 아트 디렉터로 거듭나고 계시는 우리 마봉 이장님의 훌륭한 솜씨를 감상하시고, 부디 많은 댓글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_ _)


그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싱글대디 신지훈은 오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었다.

퇴근길에 아들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부랴부랴 씻기고, 늦은 저녁밥을 후다닥 먹은 다음, 아직 식사를 다 못 끝낸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나 밀린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세탁기가 더는 무리라며 옷을 뱉어낼 때까지 빨랫감을 넣고 돌리고서, 숨은 먼지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석구석을 걸레로 깨끗이 닦았다. 허약하게 태어난 아들이 혹시 아플까 봐 그는 위생과 청결에 특히 신경을 썼다.

한편 그의 아들 휘는 밥을 다 먹고 익숙하게 그릇과 수저를 모아 싱크대 안에 넣었다. 그리고 바쁜 아빠를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책상 앞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띠리링~ 띵띵~ 어느덧 1시간이 흘러 세탁이 끝났다. 지훈은 서둘러 설거지를 마무리하고서 젖은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내어 건조대가 있는 거실로 가져갔다.


“아이고.”


아들이 손에 크레용을 쥐고 스케치북을 베개 삼아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지훈은 빨래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양치 아직 못 시켰는데.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곤히 잠든 아이의 말랑하고 통통한 볼을 어루만졌다. 사랑스러움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밀려들어 촉촉이 젖어든 그의 눈에 아들이 그린 그림이 들어왔다. 아직 노란 해가 떠있는 하늘 아래 아빠와 아들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장면이었다.


1765674718245.png 간절한 소망과 기대를 담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휘 어린이.


그림 속 자신의 손에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빠가 오늘도 늦게 왔다고 아들은 심통을 부렸다. 손도 안 잡고 겁도 없이 혼자 앞에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훈은 어떻게 하면 아이의 화를 풀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한 베이커리가 눈에 띄었다.


“휘야, 저기서 빵 사줄까? 우리 휘 좋아하는 초코크림빵, 소라모양 그거. 응?”


아이의 걸음이 멈추었다. 마지막 자존심인지 휘는 뒤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고 고마워서, 지훈은 웃음이 절로 났다.


부자는 베이커리 안으로 들어갔다. 지훈이 약속대로 초코 소라빵을 쟁반에 담고 있는데, 휘가 뭔가에 홀린 것같이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케이크. 겨울 시즌을 맞이해 한껏 화려해진 케이크들이 진열대에 쭉 늘어서서 순수한 동심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지훈은 진열대 유리에 찰싹 달라붙어 케이크를 구경하는 휘에게 다가가 물었다.


“케이크 먹고 싶어?”


케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조그만 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며칠 뒤에 우리 휘 생일날인데, 아빠가 그날 사갈까?”


언제 화가 났었냐는 듯, 반짝이는 두 눈이 지훈을 향했다.


“정말? 아빠, 내 생일날 일찍 올 거야?”


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무슨 케이크가 좋아? 골라 봐.”


휘는 한참 동안 눈을 바삐 움직이며 망설이더니, 마침내 한 케이크를 가리켰다. 겉에는 초코 가루가 뿌려져 있고, 위의 가장자리에는 동그란 생크림들이 토끼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가나슈 케이크였다.


1765674719084.png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의 생일 케이크를 고른 휘.


“저거? 알았어. 실례합니다, 가나슈 케이크 하나 예약 주문하고 싶은데요.”


찌지직 지직- 생일 케이크를 약속하는 하얀 종이가 길게 뽑혀 나왔다. 휘는 부푼 가슴을 안고서 한 손에는 초코 소라빵을, 다른 손에는 아빠 손을 잡고서 베이커리를 나섰다.




곧 돌아오는 다섯 살 생일, 그리고 아빠의 약속. 아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새삼 깨달은 지훈은 내일 회사에 가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날 반차를 내리라 결심했다.


- 여보, 우리 휘...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 어이구, 우리 아들. 양치는 하고 자야지?”


잠투정을 하는 아들의 볼에 뽀뽀 세례를 퍼부으면서, 그는 아들을 안고 욕실로 갔다.




휘의 생일. 마침 눈이 내렸다.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든 지훈은 기뻐할 아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그가 뭔가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에 위치한 어린이집 창문에 아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아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듯이 지훈의 머리와 어깨 위로 하얀 눈송이가 떨어졌다.

드디어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지훈은 1초라도 더 빨리 아들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에 초록불을 보자마자 앞으로, 찻길로 발을 내디뎠다.


부아앙. 끼이익-! 쾅!


이른 연말 분위기에 취한 음주운전. 아침부터 내린 눈 때문에 빙판길이 된 도로.


아이가 단 하나뿐인 아빠를 잃은 이유였다.






<25년 후>


“안 일어나냐!”


“으, 5분만 더...”


“안돼! 얼른 일어나!”


삐비빅- 6시 알람과 함께 쩌렁쩌렁한 지니의 고함소리가 귀를 울렸다. 훌렁~ 우악스러운 그의 손에 잡힌 이불이 너무도 허망하게 젖혀졌다. 무방비 상태로 서늘한 아침 공기의 기습을 받은 나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출근해야지. 당장 일어나서 밥 먹는다, 실시!”


“... 네에, 네에.”


지니의 등쌀에 떠밀려 나는 눈을 감은채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일어났는데도 순간 어지러워서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저혈압이라 아침이 힘들건만...


“으, 추워.”


겨울.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빨리 먹어. 늦겠어.”


“응.”


우물우물. 나는 염소 마냥 입에 토스트를 물고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지니가 구시렁거리며 찬장에서 누텔라를 꺼내었다.


“다 큰 놈이 초콜릿 없으면 빵도 못 먹고, 쯧쯧. 오늘만이야.”


“어, 웬일? 땡큐.”


내가 세 번째로 빈 소원에 문제가 있다며 천계에서 검토하는 동안, 지니는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이제 1년이 다 되어 간다. 더 이상 소원은 안 들어주지만, 그래도 집안일을 해주니 나도 크게 불만은 없다.

잔소리만 빼고.


아침을 먹고 나자 시간이 촉박해졌다. ‘네가 느리게 먹어서 그렇다’는 둥 또 한 소리를 들을까 봐 허둥지둥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원래 안 먹는데, 하도 먹으라고 야단이라 억지로 먹는 거니까 그쪽이 화내면 안 되지 않나 싶긴 해도.


“간다. 아참, 나 오늘 늦게 와.”


“뭐? 에이... 그런 건 미리미리 얘길 했어야지!”


“왜? 뭐 준비했어?”


“그건 아니지만, 주부에 대한 예의랄까.”


“... 별. 저녁 안 차려도 되고 좋잖아.”


“그야 그렇지. 그럼 오늘은 간만에 여유롭게... 아참, 야 이거 가져가!”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지니가 지갑을 던져주었다. 분명 코트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모르는 새에 빠졌었나 보다.


“어, 큰일 날 뻔했네. 땡큐.”


밖에 나와 보니 하늘이 온통 우중충한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쌩쌩 부는 찬바람을 피해 코트깃에 얼굴을 묻었다. 무거운 하늘을 외면하며, 일부러 바닥만 바라보며 불편한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버스정류장 인파 속에서 흥분한 소곤거림이 멋대로 들려왔다.


“들었어? 오늘 눈 올지도 모른데.”


“만약 오면 첫눈이네.”


뭐가 좋다고 저럴까. 차갑고, 축축하고, 질척거리고, 더럽고, 뭣보다... 미끄러운데.

괜스레 만지작 거린 전화기 화면에 오늘 날짜가 떴다.


‘... 하필 오늘.’


눈이, 온다고..


1765674718816.png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버스정류장. 눈이 온다는 말에 휘는 착잡한 기분을 느낀다.




“이따가 눈 많이 내린다는데, 길 막히기 전에 그만 퇴근들 하지.”


저런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자한 팀장님이 팀원들의 안전을 염려하며 집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다른 직원들은 하나 둘 못 이기는 척 일어났지만, 나는 모른 척 계속 앉아 있었다. 막 외투를 걸치며 팀장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대리, 안 가고 뭐 해?”


“아 저는... 좀 있다가 가겠습니다.”


“왜? 급한 일도 없지 않나?”


“그게... 뭐 좀 미리 해두고 싶어서요.”


“그래? 조금만 하다가 가. 알았지?”


“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손인사를 하는 팀장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털썩 다시 의자에 주저앉아 아직 데드라인이 한참 남은 기획안을 마주했다.


그저 혼자 남기 위한 변명거리.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니가 보낸 메시지였다.


[카페]


“카페? 밑도 끝도 없이 뭔 소리야?”


그때, 멀리서 수군거리는 여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회사 앞 OO카페에 웬 모델 같은 남자가 와 있대!”


“진짜? 모델 누구?”


“그 ‘돌체 앤 가바나’ 광고에 나온 남자, 이름 뭐였지?”


“데이비드 간디? 대박!”


‘... 간디?!’


나는 벌떡 일어나 컴퓨터 화면을 잠그고 코트를 집어 들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글력(筆力)'이 손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