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정신 사나울 수 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문득 돌이켜 보니, 지금껏 너무 징징거렸다 싶어서 뻘쭘합니다.
그 꼴사나운 게시물(글도 아니죠. 그냥 '게시'한 '물', 그저 어떤 것이죠.)을 하나라도 보신 분이라면 아마 의아해하실 것 같아요.
'이런 인간이 왜 아직도 살아 있지?' 하고요.
1. 왜 아직 살아 있지?
그건... 기력과 기분이 바닥을 칠 때, 그 반동으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제가 바통터치를 해서 그렇습니다.
아주 작은 하나, 아주 랜덤한 무언가를 트리거로 기분이 손바닥 뒤집히듯이 바뀌면서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됩니다. 아주 낙천적인 제가 되지요.
예를 들면 그렇죠, 바로 어제로군요. 설거지를 하던 중 갑자기 10년도 더 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넌 요새 어떨 때 제일 행복해?"라는 친구의 질문에 "뜨거운 물로 설거지 한 그릇이 뽀드득 소리를 낼 때."라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 (당시 미혼이었던 친구는 "이런 아줌마 같으니.."라며 저를 타박했습니다. 이젠 그 녀석도 그 맛을 알지 않을까요.)
그날의 기억이 눈앞에 아른거리면서 '그러네. 정말 행복하네.' 하고 피식 웃은 순간, '뜨거운 물로 설거지? 나 완전 초 럭키비키잖아!' 하는 제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어제는 그렇게 좋은 날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재수가 없는 날이었죠.
여느 때처럼 찾아온 기분 저하에 좋지 않은 몸 컨디션까지 겹친 상태에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움직이고 있는데, 자꾸만 실수를 해서 처리할 일이 늘어나는 겁니다. 뭔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 그냥 가만히 있는 편이 낫겠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주부로서, 엄마로서, 청소는 미뤄도 애들 저녁은 준비 안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재료를 볶는데 아니 이놈들이 자꾸만 팬에서 탈출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맨 처음 하나가 튀어나갔을 때는 "에휴." 하며 그러려니 했지만, 탈주자가 한번 생기자 이것들이 뒤따라서 불지옥 탈출을 시전하는 겁니다.
평소 같으면 자책을 하면서 난리 블루스를 췄을 텐데, 이번엔 '하나만 튀었으면 모른 척 청소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이젠 청소를 안 할 수가 없게 되었네? 오히려 좋아!'라며 실실 웃기까지 했습니다.
'좋았어! 더 튀어라. 그래야 청소하는 맛이 있지.' 이러면서요.
이상하죠? 그래서 살아 있는 모양입니다. 아주 잠깐 나타나서 잠깐 에너지를 주고 사라질 뿐이지만. 그래서 그 뒷감당은 다시 흐느적거리는 제가 다 해야 하지만.
'우울증'하면 계속 공허해하고 슬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왜 이렇게 멀쩡하냐고 궁금해하실 거 같아서 이렇게 구차히 말을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2. 살아남은 자는...
살아 있다, 살아남았다 하니까 생각나는데요.
여러분은 '비발디'의 <사계>를 듣고 어떤 게 어떤 계절인지 다 구분 가능하신가요?
살아남는 거랑 사계가 뭔 상관이냐고요? 상관이 있고 말고요. 잠깐만 들어보세요.
사계 중 '겨울'은 1악장이랑 2악장이 엄청 다르잖아요. 1악장이 시린 눈보라를 맞으며 (아, 눈 시려서 눈물이 날 것만 같..) 서서히 발이 얼어가는 느낌이라면, 2악장은 집에 도착해서 난롯불에 언 발을 녹이는 안락한 느낌이 들잖아요? "아~" 하면서 발을 턱, 어딘가에 얹고서. 손에는 따뜻한 차 한 잔.
크~ 살아남은 자의 여유랄까. 창밖의 추위는 이제 남의 얘기죠.
창밖의 추위 하니까 또 생각납니다. 저희 집 거실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데요, 건너편에는 앞집 마당에 심어진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경치가 꽤 그럴싸하답니다. 그래서 주말에 시간 나면 거기 앉아서 차를 마시는데요. 어느 날 보니까 맹금류(너무 멀어서 정확히 뭐였는지는 안 보였어요. 가까이서 본다고 해도 알 턱이 없지만.) 한 마리가 멋들어지게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전 그걸 올려다보며 남편에게 중얼거렸습니다.
"우리한테는 멋져 보이지만, 쟤는 지금 춥다고 구시렁대고 있지 않을까?"
"하하, 맞네."
"아 C,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날개 펴고 날아다니려니까.. 으, 찬 공기가 깃털 속에 파고들어."
"오늘따라 먹을 것도 안 보이고, 이러면서?"
"어. ㅎㅎ"
늘 하는 얘기지만 '역지사지'라는 건 내가 알고 납득할 수 있는 범위에서나 가능한 것이죠.
잘 모르는 것에 사람은 그렇게 무심해질 수가 없습니다.
말씀드린 그 창문이 말입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앞집 나무들이 그대로 비치나 봐요. 가끔 새들이 날아와서 머리를 부딪히는 거 보면.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양이 스티커 같은 걸 붙여 놓으면 그런 일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 창문에는 얼마 전 머리를 박은 한 불쌍한 새의 머리 깃털이, 뽀송뽀송하고 가녀린 깃털이 몇 개 붙어 있습니다. 좀 씻어내고 청소를 해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가끔 창문가에 앉아 있다가 그게 보이면 양심이 찔립니다.
빨리 스티커를 사서 붙여야 하는데... 내 일이 아니라고 미루는 거 보면 참.
그 새는 살았을까요? 보니까 시체는 없었습니다만, 뭐가 물어갔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 새는 언제 깨달았을까요. 자기가 본 나무가 유리에 비친 가짜란 걸.
3. 너무나 선명한 환상
임종을 앞둔 한 노인. 그를 둘러싼 가족들이 흐느낀다.
"흑흑, 아버지."
"할아버지이~ 으앙~"
코에 산소 튜브를 끼고 있는 노인은 앙상한 손을 들어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인다.
"아이고, 울지 마.. 이 할애비, 참 행복했다."
그래. 참 행복한 인생이었지.
가족들의 마지막 배웅 속에서, 노인은 편안히 눈을 감는다.
삐-------
삐빅- 삐비비빅- 삐리리릭-
마지막 순간, 노인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곳은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생명체 둘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고, 노인은 벌거벗은 온몸에 스티커가 붙은 채로, 푹신한 침대와 따뜻한 이불 대신 차갑고 딱딱한 금속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게 대체. 그러나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노인은 숨을 거두었다.
"이것 봐! 얘도 깨어나고 바로 죽었잖아. 기본 설정이 잘못되었다니까."
"아 이런... 버추얼 환상이 너무 생생했나?"
"그것도 그렇지만 기간도 너무 길게 잡았어. 그 속에서 수명을 다 한 거라니까?"
"그게 감이 잘 안 온단 말이야. 야, 어떡하지? 이제 몇 마리 안 남았는데. 우리 숙제 끝낼 수 있을까?"
한 외계인이 숙제를 위해 구해 온 실험체가 든 케이지를 돌아보았다. 그 안에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인간이 다섯 있었다.
4. 본의 아니게 주부로서 실격인 점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만,
한 김에 더 얘기해 볼까요. 혹시 쌓여 있는 먼지를 청소기로 빨아들이는 쾌감을 느껴보신 분 계신가요?
전업주부가 집에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하다니!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한 2주 기력 없이 멍하니 있다 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파워 당당)
그래도 그걸 치울 때 말입니다? 엄청난 희열이 느껴진답니다. 뭔가 여기저기 만연한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기분이랄까, 세상이 다시금 제 모습을 찾은 느낌이 들면서 '내가 정말 반듯한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뿌듯함마저 든답니다.
그러고 보면 저희 아버지는 굉장히 부지런하시고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분이셨는데요, 어머니는 정반대셨어요. 어머니의 청소는 그냥 밀대로 슥슥 미는 게 끝이어서, 가끔 한 번씩 아버지께서 청소기로 구석구석 청소를 하셨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저는 일종의 하이브리드이지 싶습니다. 잘 안 하는데 한 번 하면 미친 듯이 꼼꼼하게 하는.
예? 좋게 말해서 하이브리드지 그냥 게으르고 더러운 인간이지 않냐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아버지의 부지런함과 꼼꼼함보다 어머니의 게으름이 더 자주, 주로 발현이 된다면 말이죠? 그럼 게으름이 우성인 거 아닌가요?
5. 간바레(힘내), 생각쨩(ちゃん)!
하이브리드 하니까 또 생각나는군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만, 여기까지 오셨으면 진작 눈치채셨겠죠. '아, 이 자식 또라이구나.' 하고요.
그렇답니다! 제 글도 또한 그러하답니다.
엄근진 브런치에도 도파민 생산공장인 웹소설 플랫폼에도 어울리지 않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위로를 전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닌, 정체불명 하이브리드 괴문(怪文).
뭐... 좋게 말해서 하이브리드지, 솔직히 어정쩡한 거죠.
글쟁이? 이야기꾼?이 되고 글감에 휘둘리면서부터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우리는 사실 '생각'을 퍼뜨리기 위한 장치 내지는 생각의 생식기관이 아닐까. 생각은 자신들의 생식활동을 위해 우리를 이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널리 퍼지고, 다른 생각과 만나고, 또 다른 생각이 태어나는 그 과정이 말입니다, 꼭 번식과정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면 제 '생각'은 참....... 안습일 정도로 인기가 없는 놈인 겁니다.
잘생긴 너드남 말고 진짜 찐 너드남...
아닛?! 그렇다고 울지 말라구, 생각쨩!
비록 세상은 네게 차가운 반응을 보여도, 내가 너와 함께 웃어줄 테니까!
자, 내 안에선 맘껏 너를 펼쳐 봐!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실제 모습)
"크큭, 하하하하하하하."
"엄마, 저 사람 이상해." (슬금슬금) "어머 얘, 눈도 마주치지 마."
근데 말이지 생각쨩, 너도 꾸미면 좀 인기가 있을지도 몰라.
일단 그 안경부터 벗어 볼.... 아니야. 도로 써라.
"크흐으으윽... 천하에 모쏠 같으니."
"엄마, 저 사람 갑자기 울어." (손 잡고 도망가며) "얼른 다른 데로 가자."
뭐.. 힘내라고, 생각쨩.
뭐가 됐든 내가 써줄 테니까.
6. 실은 무서워요.
무서워졌습니다. 글을 쓰는 게.
그래서 손을 놨어요.
근데 이상한 겁니다. 저는 왜, 뭐가 무서운 걸까요.
그야 '나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틀렸다는 건, 정답까지는 아니어도 '맞다'는 범주가 있다는 뜻일 텐데요. 뭐가 맞는 건지는 잘 몰라도, 적어도 봐줄 만한 글을 쓰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하다 못해 쓰는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근데 즐겁지가 않고 무서워진 겁니다. 넓은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좁은 외줄이 된 것처럼요.
왜 무서울까...
내가 뭐라고.
7.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알고 보니 어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건 냉장고에 오래 묵어 계시던 잔반을 먹고 배탈이 나서였습니다. 토하고 설사하고, 아주 난리를 치렀어요. (여러분은 절대! 냉장고를 과신하셔서는 안 됩니다.)
애들 앞에서는 내색을 안 하려고 했는데 기운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축 늘어져 있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물을 끓이더니 차를 한 잔 만들어 주더군요. 미안하기도 하고, 기특하고 고마워서 저는 웃으며 물었습니다.
"어? 나 주는 거야? 이게 뭐야?"
"꿀차요."
"그래? 고마워."
"거기에 매실 액기스랑 기침약 탔어요. 꿀은 목에 좋고, 매실은 배탈에 좋으니까요."
"... 기침약까지?"
"네. 배탈인지 감기인지 아직 모르니까요.(씨익)"
덜덜덜.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아아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 엘릭서든가 히드라의 독이든가, 러시안 룰렛 포션이로구나. 기침약은 정량 재고 넣은 거겠지?
"고, 맙다."
그래도 이런 나를 엄마라고, 타준 정성이 있으니 마셔야.... 푸흡!
결론은, 참으로 정신 사납다.
문득 드는 의문인데, 이런 제 구독자 수가 어떻게 70일까요?
저게 10대로 떨어질 때까지 좀 더 분발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