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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by Outis

꾸물거리는 회색빛 하늘과 차가운 바람. 어느 흐린 겨울날, 얇은 옷차림의 어린 소년은 아파트 앞 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자신과 같은 이런 날에 죽어 겨울과 하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추위에 대한 본능적인 보호반응인 몸의 떨림을 의식적으로 멈춘 채, 소년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손발이 없어진 거 같은 느낌이 들면서 팔다리가 무거워졌다. 함락당한 성벽 안으로 군대가 몰려드는 것처럼, 저항을 멈춘 소년의 몸속으로 냉기가 스며들어 마지막 보루인 심장 주변을 둘러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다 끝날 거야. 소년은 속으로 되뇌었다.


“안녕, 꼬마야.”


그때 누군가가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들어보는 부드러운 중저음. 소년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뭐 하니?”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키가 큰 젊은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정한 초록색 눈동자와 겨울하늘 같은 회청색 눈동자가 만났다.


“자, 가자. 바람이 점점 차가워진다.”


남자의 따스한 손이 얼음장 같은 작은 손을 잡았다.





“너 같은 거 몰라. 본 적도 없어.”


벤은 배에 힘을 주고 단호히 말했다. 딱히 좋은 수가 생각난 것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살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건 딸을 위해서였다. 자신마저 죽으면 아직 의식도 되찾지 못한 그 가엾은 아이를 어쩐단 말인가.


‘절대 죽을 수 없어. 어떻게든 살아야 해. 반드시 살아서 소피아한테 돌아가야 한다고.’


잘 갈아놓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 소년은 적개심으로 가득 찬 초록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이거 봐라?”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소년이 고운 미간을 구겼다. 그는 큐브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폈다. 하얀 큐브가 잠깐 푸르게 빛나더니 다시 원래 색깔로 돌아왔다.


“그럼 얌전히 사라져.”


소년은 벤을 향해 큐브를 던졌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당한 속도로 날아가던 큐브는 마치 질량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아무 저항 없이 벤의 가슴을 통과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 윽!”


벤은 가슴 안에서 폭탄이 터진 것 같은 큰 충격을 느꼈다. 그의 몸이 휘청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금 뒤 끔찍한 고통이 가슴에서 시작하여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독처럼, 그것은 벤의 몸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그의 모든 것을 잠식하려는 듯했다.


“흐웁! 흐윽!”


그는 숨을 몰아쉬며 고통에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관자놀이에 푸른 핏대가 서고, 이가 부서져라 앙다문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눈의 실핏줄이 터져 흰자위가 붉게 변하자 평소엔 부드러워 보이던 녹색 눈이 섬뜩하게 변했다.


“으윽!”


갑자기 벤이 머리를 감싸 쥐며 앞으로 쓰러졌다. 금방이라도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에 벤은 눈을 꼭 감았다. 검은 암막 위로, 머리 공간 속에서 기억의 파편들이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처럼 마구 흩어졌다. 온전한 기억이 찢어지고, 맞지 않는 조각들이 엉겨 붙어 기이한 장면들을 만들어 냈다. 그 광란의 수라장 속에서 벤은 딸의 얼굴을 보았다.


‘소피아!’


그 아이의 의식을 앗아간 사고가 나기 직전, 차 뒷좌석에 앉아 아내의 노래에 맞추어 즐겁게 흥얼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날 벤은 백미러에 비친 아이의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빨간 신호에 걸린 사이 잠깐 뒤를 돌아봤었다.


- 여보!


날카로운 아내의 비명과 함께 딸의 표정이 점점 공포로 굳어졌다. 잠시 후 아내와 딸이 탄 쪽으로 커다란 트럭이 달려와 차를 들이받았다. 미처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였다.


당시 상황이 한컷 한컷 슬로모션처럼 펼쳐졌다. 창문에 금이 가고, 유리 파편이 튄 방향 하나하나가 다 보였다. 차문이 안쪽으로 구부러지고 차가 옆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쾅. 쾅. 팡! 에어백이 작동되는 소리와 함께 머리 뒤쪽에 쿠션감이 느껴졌다. 뒷좌석에서는 의식을 잃은 딸의 머리가 이쪽저쪽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쾅! 마지막 충격파와 함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 으윽, 소피아... 여보...


얼른 딸과 아내에게 다가가 그들을 살피고 싶었지만, 벤은 구겨진 차 내부에 몸이 끼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좋지 않았다. 트럭이 들이받은 쪽 어깨와 팔다리는 물론 갈비뼈까지 으스러져 있었고, 출혈도 심했다.

아내는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 날... 기억해 줘요.


누군가가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모든 장면이 거꾸로 흐르더니, 사고가 나기 직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이전으로 돌려보려는 듯 한참 버벅거리던 화면은 결국 포기했는지 다시 사고장면으로 이어졌다.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딸의 얼굴이 굳어가고, 트럭이 와서 차를 들이받았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인데. 아까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너무 괴로운데. 또다시 반복이다.


“그만, 그만해!”


벤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면 사라질 줄 알았건만, 잔인한 기억의 상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아아, 그만! 그마안!!”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벤을 소년은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밋밋한 회색 수도복을 입은 한 중년 여자가 캄캄한 교회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러갔다. 그녀는 양손으로 예배당 문을 힘껏 밀고 들어가 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시스터에게 달려갔다.


“시스터! 오큘러스(Oculus)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놈이 지금 그와 접촉을..?”


다급한 여자의 외침에도 시스터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그런 시스터의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기도를 마친 시스터가 눈을 뜨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스터, 놈이...”


이때만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으나, 시스터는 엄숙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방금, 지극히 높으신 우리 아버지를 뵈었습니다.”


“아, 아버지... 아!”


‘아버지’라는 말 한마디에 여자는 하려던 말을 모두 잊고서 탄성을 내뱉었다. 초조함이 가득하던 그녀의 눈에 경외와 감격의 눈물이 차올랐다.

시스터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면서 여자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여자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알고 계셨군요!”


“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모든 건 우리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그럼, 일부러 그자가 그에게 접근하도록 유도하신 건가요?”


“맞아요.”


시스터는 싱긋 웃고는 앞에 있는 제단을 향해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녀의 머리 위로 스테인드글라스의 찬란한 빛이 축복처럼 쏟아졌다.


“우리 어린양은 이번 시험을 통해 각성에 이르게 되겠지요.”


회색 수도복을 입은 여자는 감명을 받은 듯 가슴에 손을 모았다. 그러다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넌지시 시스터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자는 보통이 아닌데요. 이 세상의 법칙에 간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늑대들까지 끼어든다면, 어린양 혼자서는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늑대’라는 말에 시스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과연. 이제 막 번데기에서 나온 나비에게는 너무 큰 시련일지도 모르겠군요.”


시스터는 근엄한 얼굴로 여자를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디스포저(Disposer)를 보내세요. 단, 디스포저의 간섭은 각성 이후여야 합니다.”


명을 받은 여자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시스터를 올려다보았다. 스테인드글라스 맨 위에 위치한 세 개의 달 문양이 그녀가 본 각도에선 시스터의 머리 위에 쓰인 왕관처럼 보였다.


“시스터의 분부대로.”





하얀 늑대 탈을 쓴 한 남자가 매캐한 담배연기로 가득한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연기의 발원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곳에는 기다란 담뱃대를 든 남자가 소파에 반쯤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남자의 한쪽 눈에는 검은 안대가 씌워져 있었고, 다른 쪽 눈 밑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거친 붉은 머리카락은 그가 걸치고 있는 부드러운 초록색 비단옷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보스, 올빼미의 보고입니다. 드디어 시스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디스포저 한 마리가 지금 ‘그’를 향해 이동 중입니다.”


안대를 쓴 남자가 눈을 떴다. 샛노란 눈에 흥분이 일렁였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대충 걸치고만 있던 비단옷이 스르륵 흘러내리면서 어깨에 새겨진 문신이 드러났다. 달을 삼키고 있는 검은 늑대의 그림이었다.

남자는 씩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때가 됐다. 나갈 준비 해.”





소년은 경련하듯 몸을 떨고 있는 벤을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벤은 반쯤 의식을 잃은 채 꺽꺽 소리만 내고 있었다.


‘슬슬 끝인가. 저 얼굴을 하고서 내 공간에 멋대로 들어오길래 뭔가 있나 했더니,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뿐 아무 반격도 하지 못하는 벤을 보면서 소년은 왠지 마음속이 어수선했다. 제일 먼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은 뭐가 다행이냐고 다그치는 소리에 쏙 들어갔다. 대체 뭘 기대한 거냐고, 실망하는 그를 꾸짖는 목소리도 있었다.

각양각색의 모순된 감정. 그러나 모든 건 한 곳을 향해 있었다.


“... 벤.”


짙은 그리움과 후회가 담긴 탄식이 소년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줄곧 냉담하던 소년은 벤의 마지막 모습을 차마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벤의 의식은 완전한 암흑과 정적 속에 갇혀 있었다. 눈을 감아서 어두운 건지, 아니면 눈이 멀어버린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고통 외의 모든 감각을 잃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산채로 까맣게 타서 사라지다니. 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오늘 처음 본 녀석에게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의 모든 것을, 목숨을, 꿈을, 인간의 형태까지 빼앗긴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평소에 그는 딸이 의식을 되찾으면 도시를 떠나 조용한 시골로 가서 살까 하고 종종 생각했었다. 하얗게 세어 가는 머리카락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딸을 닮은 손주들을 보다가 이제 됐다 싶을 때 조용히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비현실적인가 싶어 벤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웃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렇게까지 평화롭지 않아도 괜찮았다. 지금 같은 삶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이런 끝만 아니라면.


- 날... 기억해 줘요.


이렇게 모든 걸 빼앗긴 채, 기억을 잃어가면서 죽고 싶진 않았다.


“... 벤.”


그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적어도 그렇다고 벤은 생각했다.


‘누가 나를... 부르고 있어.’


그러자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반딧불같이 작고 연약한 빛이 일렁였다. 벤은 그것이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나오는 빛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거기에 자신의 의지를 더해 보았다.


‘살고 싶어.’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자 소망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바람에 응답하듯, 작게 일렁이던 빛이 더욱 커지고 뚜렷해져 갔다. 벤은 감정에 북받쳐 외쳤다.


“나로서, 벤으로서 계속 살고 싶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별이 목숨을 버리고 폭발하는 것처럼 밝은 빛이 모든 어둠을 집어삼켰다.





벤의 가슴에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오면서 소년의 큐브가 그의 몸 밖으로 튕겨 나왔다. 툭하고 큐브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소년은 깜짝 놀라 벤을 돌아보았다.


“?!”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며 뒤로 튀어 올랐다. 갑자기 강한 바람이 일더니 날카로운 낫처럼 소년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흠집을 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몸이 두 동강 났겠다는 생각에 소년은 모골이 송연했다.


“뭐야, 대체 뭐야?”


믿기지 않는 일은 계속되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벤의 몸이 서서히 공중에 떠올랐고, 그를 지키려는 듯 바람이 그의 주변에서 위협적으로 휘몰아쳤다.

이해할 수 없는 힘에 대한 두려움이 소년의 가슴속에 피어올랐다. ‘이곳’에선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큭!”


그는 옆으로 몸을 틀어 창처럼 꽂혀 들어오는 바람을 겨우 피했다. 바람은 소년을 지나친 후에도 계속 나아가 왜곡된 공간의 끝을 할퀴었다. 그 충격으로 공간을 지탱하고 있던 경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이를 기점으로 자잘한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공간이 산산조각 나면서 집이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는 걸 보고 소년은 이를 바득 갈았다.


이번엔 반딧불처럼 부드러운 빛이 하나 둘 벤의 몸에서 나와 그를 감쌌다. 그러자 검게 탄 신체 부분이 말끔히 회복되었다.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럴 수가... 설마 이 녀석!”


재생을 끝낸 벤의 몸이 부드럽게 하강했다. 발이 땅에 닿자 감겨 있던 벤의 눈이 떠졌다.

갓 태어난 생명처럼 아직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초록색 눈동자가 소년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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