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2)
절망(絶望)과 절망(切望), 그 사이에서.
아랫집 문을 열고 들어간 벤은 아주 짧은 순간 마치 물에 빠지는 것처럼, 얇은 막을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온몸에 저항감을 느꼈다. 집안이 어둡긴 했지만 딱히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건 보이지 않았는데. 벤은 혹시나 싶어 얼굴과 몸 여기저기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다행히 감각은 정상이었고, 몸에 이상이 있거나 뭐가 묻어 있지도 않았다.
그때 거실 안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어떻게 들어왔지?”
아직 어둠에 익지 않은 벤의 눈이 다급히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헤매었다. 눈 한 번 깜빡할 새가 얇게 저며진 사이사이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튀어나왔다.
‘나는 아직 잘 보이지도 않는데 놈은 내가 보이는 거야. 이러다간 기습을 당할 텐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걱정과 달리 벤은 너무 쉽게 침입자를 찾아내었다. 숨을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비스듬한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검은 그림자가 붉은 두 눈을 빛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섬뜩해서 벤은 차라리 안 보이는 편이 더 좋았겠다 싶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침입자는 벤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벤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그의 모습을 좀 더 뚜렷이 담았다.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백발의 소년. 벤이 상상했던 험상궂은 범죄자의 인상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매우 아름다웠으나,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런지 벤은 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불편했다.
벤은 의구심을 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랫집 아저씨가 무기도 없는 저 허약하게 생긴 애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할 거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주범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벤은 소년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소년의 등 뒤에서 힘없이 일렁이고 있는 까만 물체를 발견했다. 까만 재를 공중에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생긴 그것은 내부의 어떤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벤은 보자마자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저게 뭐야? 가슴은 또 왜 이렇게 답답하지?’
“저기, 뭐 안 해?”
소년이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앞뒤 다 자르고 뭐 안 하냐니, 벤은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 뭐를?”
“무려 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뭐냐니.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 어?”
벤은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보고 소년이 한숨을 쉬었다.
“하... 암튼 거기 있어봐. 이거 먼저 처리하고.”
소년은 뒤로 돌았다. 아까 그 까만 물체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깜빡깜빡 빛나는 하얀 큐브가 그 자리에 있었다. 소년이 손을 펼치자 강아지가 주인에게 달려가듯 큐브가 그의 손 위로 날아들었다. 소년은 큐브를 손안에 쥐고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진홍빛이었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주앙 디 가르시아(Juan D. Garcia).”
강산성 액체 한 방울이 매끈하게 반짝이는 금속 표면을 할퀴며 흘러내리는 것처럼, 아랫집 아저씨의 이름을 읊은 소년의 입술이 섬뜩한 비웃음의 곡선을 그렸다.
“주제에 제법 그럴싸한 이름을 ‘썼었’잖아.”
‘그럼... 아까 그 까만 그게..?!’
벤은 방금 소년이 한 말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 까맣게 타들어가며 사라지던 그것이 사람, 가르시아 씨였다는 것을. 호시탐탐 명줄을 노리는 사신의 얼음장 같은 손에 목덜미를 잡힌 것처럼 벤은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그의 사고 회로가 미친 듯이 폭발하며 원하지 않는 결과물을 뿜어댔다. 저 아이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아, 이번에도 허탕이네. 설마 나 놀아나고 있는 건가?”
사람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하고서 아무런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 소년을 바라보며, 벤은 뱀 앞에 선 개구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전혀 다른, 압도적인 힘과 악의를 가진 존재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공포 속에서 벤은 그만 얼어붙어 버렸다.
서슬 퍼렇게 빛나던 두 눈에 회색빛 재가 내려앉고, 소년은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으며 벤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벤은 소년의 저 말이 벤 자신에게 묻는 건지, 아님 혼잣말인지 헷갈렸다. 그는 아까부터 소년의 말투가 계속 거슬렸다. 오늘 처음 본 상대가 왠지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은 벤으로 하여금 단순한 민망함이나 당혹감을 넘어서 공포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 정말 유감입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벤의 기억은 이번에도 같은 막다른 길에서 멈추었다. 하루아침에 뿌리와 잎이 잘린 들풀 같은 신세가 되어 눈을 뜬 그날. 반쯤 회상에 발을 걸치고 있는 벤의 의식에 소년의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넌 누구지? 어째서 그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거듭 이상한 질문을 받고 있자니 벤은 문득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덕분에 그는 자신을 한없이 아래로 끌어당기는 상념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아니 원래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라고. 무슨 내가 일부러 이 얼굴을 고르기라도 한 것처럼 헛소리야.’
억울함과 분함, 능동적이고 반항적인 감정의 도움닫기에 힘입어 제 힘을 되찾은 벤의 논리적 사고력이 드디어 곤경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저 소년을 따돌리고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운이 따라준다면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한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 하늘이 돕는지, 점점 거리를 좁혀오던 소년이 걸음을 멈추었다. 소년과 벤 사이의 거리는 1미터 반 남짓. 뒤에 있는 문까지는 몇 걸음 안 되니까, 뒤로 돌다가 실수로 넘어지지만 않으면 충분히 붙잡히지 않고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벤은 입에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눈빛으로 잡아두려는 듯이 소년을 쏘아보며 속으로 셋을 거꾸로 세었다.
‘셋, 둘, 하나, 지금!’
카운트 다운을 마친 벤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뒤로 돌아 뛰어나갈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휘청거리며 멈춰 섰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에 비친 광경은 매우 비현실적이고 절망적이었다. 고작 몇 걸음 뒤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문은 저 멀리 작게 보였고, 현관은 달리기 트랙처럼 길게 늘여져 있었다. 벤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순간 공포심에 헛것이 보이는 건가 싶었으나, 벤은 금세 깨달았다. 이것도 저 소년의 짓이 분명했다. 허탈하게 다시 돌아선 자신을 여유로운 미소로 맞이하는 소년을 보고, 벤은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는 스스로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알량한 영웅심리든 죄책감이든 뭐든, 애초에 그딴 걸로 달려들 일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 주제에 누굴 구하겠다고 뛰어든 걸까.
벤은 헛된 희망이라도 품고서 저 문을 향해 달리지도, 다른 해결책을 생각해 내지도,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빌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에 빠진 그에게 소년이 말했다.
“포기가 빠르네. 현명해.”
‘포기..? 난 지금 포기한 건가?’
이렇게 가만히 서 있으니 저 애의 눈에는 포기로 비친 거겠지. 벤은 딱히 거기에 반박할 마음도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걸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문 세 개가 다 닫히고 사방이 막혀버린 방에서 아무것도 없는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이 기분을.
“그래서, 넌 날 모르는 거지?”
소년은 지금까지 다른 희생자들에게 했던 것과 달리, 벤에게는 “모른다”는 대답을 유도하고 있었다. 너무 싫은 숙제를 얼른 해치우고 다신 안 보려고 마음먹는 것처럼, 소년은 손에 쥔 큐브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만지작거렸다.
한편 벤은 알았다. 무슨 대답을 한들 자신은 살 도리가 없단 것을. 그야말로 암흑, 심연과도 같은 절망 한가운데에 떨어져 있음을. 어쩐지 ‘그때’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 찰나,
- 어쨌든 조심하고 볼 일이야.
- 많이 힘들겠지만,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다른 시간대에서 출발한 셀윈의 목소리가 한 점으로 합쳐졌다.
- 자네에게는 소피아가 있잖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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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