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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is Jan 06. 2025

절망(1)

누군가에겐 현실이 악몽보다 잔혹한 것.

“Hush, little baby don't you cry. Papa's gonna buy you a mocking bird(쉿, 아가야. 울지 말렴. 아빠가 흉내 지빠귀를 사주실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


몽롱한 소년의 의식 속으로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흘러들었다. 칭얼대던 아기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아기를 재우고 있는 엄마의 자장가였다.  


“If that mocking bird won't sing, Papa's gonna buy you a diamond ring(그 새가 노래하지 않으면, 아빠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실 거야).”


소년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부디 그 자장가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 없이 노래는 어느새 마지막 구절에 접어들었다.  


“If that horse and cart fall down, you'll still be the sweetest little baby in town(그 말과 수레가 넘어지더라도, 너는 여전히 이 마을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가란다).

So hush little baby, don't say a word. Daddy loves you and so do I(그러니 쉿, 아가야. 아무 말 말고 잠들렴. 아빠도 엄마도 널 사랑한단다).”


노래가 끝나자 이어서 조심조심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엄마가 잠든 아기를 눕혀 놓고 방을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살며시 문이 닫히고, 이윽고 정적이 찾아왔다.

소년은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까 그걸 듣고서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리며 가슴 뭉클한 여운을 느낄 텐데, 그는 아무런 이미지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게 암흑과 고요에 지친 그의 뇌가 멋대로 삐 소리를 만들어냈다.  


[삐--- 삐-- 삐-]


그런데 저 멀리 물속에서 울리는 것 같던 소리가 서서히 날카로운 경고음으로 변해갔다.  


[삐!!!!!!]


‘... 아차, 이건!’


파직!  


“아아악!”


뇌로 직접 전해지는 고통에 소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사방이 꽉 막힌 검은 방.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소년은 방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천장 네 귀퉁이에선 카메라가 그를 감시하고 있었고, 양 옆 벽에 달린 스피커에선 거친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일어나! 어딜 알람이 울리는데 쳐 자고 자빠졌어!”


“하아, 하아, 하...”


코에서 미지근한 것이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어 소년은 손등으로 인중을 쓱 훔쳤다. 그의 손등과 손목에 선명한 붉은 선이 그려졌다. 입속에 흘러드는 비릿한 피맛과 아까 받은 충격의 여파로 소년은 속이 뒤집혔다.

 

“... 우욱!”


“이 새끼가! 너 또 토하기만 해 봐. 이번엔 정말 죽여버릴 거니까!”


어차피 게워낼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년은 윽박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년은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뭘 먹은 게 언제였더라. 장기 임무가 있을 때는 으레 그렇듯이 팔에는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밑에도 소변줄이 달려 있어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이틀? 사흘? 어쩌면 그 이상. 발에 채워진 수갑의 묵직함이 친숙하게 느껴지기에 충분한 시간. 그게 얼마든 어차피 의미는 없다.  


[타깃 포위 완료. 지시 바란다.]


“라져. 추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 어이! 얼른 시작해!”


“흐읍.”


소년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책상 위에 놓인 키보드로 손을 옮겼다. 앙상한 열 손가락이 쉴 틈 없이 움직였고, 빨갛게 충혈된 회청색 눈이 모니터 여섯 대를 바쁘게 오갔다. 제한시간 30초가 다 되어 갈수록 하얀 이빨이 창백한 입술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나온 피와 코피가 합쳐져 스페이스바에 떨어진 그 순간, 제한시간 5초를 남겨놓고 소년이 외쳤다.  


“시스템 다운.”


“좋았어. 작전 개시, 진입한다.”


“후우...”


소년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눈을 감았다. 총성과 비명, 고함소리. 스피커를 통해 지구 저편에서의 참극이 생생히 중개되었다.  


[아아아아악!]


추가 지시가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귀를 막아서는 안되었다. 소년은 이 방에 갇혀 결박당한 채, 저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받다가 죽게 될 처지였다.  


“... Hush, little baby don’t you cry(쉿, 아가야 울지 마).”


[으아악!!!]


소년은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숙여 피로 물들어 있는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 잔혹하구나.”  




 

우웅.


“응?”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가르시아 씨는 왠지 싸한 느낌에 눈을 떴다. 잠들기 전까지 보고 있던 텔레비전에는 아까 본 뉴스가 또 나오고 있었고, 화면 아래쪽 코너에는 11시 23분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이쿠.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그는 텔레비전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찌뿌둥한 몸을 폈다. 그때, 아까 잠결에 느꼈던 싸함이 훨씬 더 뚜렷하게 그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주변 공기의 무게와 성질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착각이... 아니야?’


그의 본능은 돌아보지 말라고, 돌아보는 순간 그저 느낌이었던 게 현실이 되어 버릴 거라고 경고했지만, 가르시아 씨는 끝내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거기엔 흐릿한 인영이 있었다.  


“누구요..?”


눈이 점점 어둠에 익숙해져 가면서 인영도 좀 더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의 정체는 검은색 옷차림을 한 십 대 소년이었다.  


“누, 누구야. 도둑?”


“이봐, 당신.”  


소년은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가르시아 씨를 불렀다. 가르시아 씨가 주춤하며 뒤로 몸을 빼는데, 순식간에 소년의 얼굴이 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으아악!”


깜짝 놀란 가르시아 씨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만 테이블에 다리가 걸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면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소년의 몸은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공중에 둥둥 떠있었다. 소년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괜찮으니까 떨지 말고. 내 얼굴을 잘 봐봐.”


가르시아 씨는 숨을 몰아쉬며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이거나, 악마의 탈을 쓴 천사. 소년이 물었다.  


“당신은 어때? 나 알아?”  




 

“사람 살려! 살려줘어!!”


‘이 목소리는, 가르시아 씨..!’


몇 계단만 올라가면 아랫집인데, 아저씨의 비명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멀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섬뜩하게 갈라진 소리는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긴박함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듣고 있자니 벤은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어, 어쩌지? 대체 무슨 일이야?’


문득 벤의 머릿속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공익광고가 떠올랐다.   


- 우리의 안전과 삶을 위협하는 테러행위.


‘테러?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중요한 빌딩도 아니고 유명인사가 있는 곳도 아닌데.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극히 평범한 아파트에서 테러라니. 여긴 그런 무시무시한 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 강도가 든 거야. 얼른 가서 도와야...’


벤이 용기를 내어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또 다른 문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 절대 직접 상대하지 마십시오.


‘... 만약 진짜 테러리스트라면? 아니 그전에, 강도라고 해도 위험하잖아.’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이 상상 속에서 몸집을 키워가는데 비해, 벤의 자신감과 정의감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어갔다. 그가 망설이는 와중에도 다급한 비명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아아아아악!”


오늘 아침에도 멀쩡히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건만. 그 사람 좋은 얼굴이 공포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을 걸 상상하니 벤은 비겁한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무언가 번뜩하고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경찰에 신고하시고,


‘그래, 경찰! 경찰에 신고하면 되잖아.’


벤은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눌렀다.  


“911입니다.”


“지금 저희 아파트에 누가 침입한 거 같아요. 사람 목숨이 위험해요. 빨리 와주세요, 빨리!”


“진정하시고 일단 주소부터 알려주세요.”


벤이 다급하게 아파트 주소를 말하는 동안 가르시아 씨의 비명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방금 들었죠, 비명소리? 얼른 좀 와주세요!”


“네? 비명이요?”


연결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은지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가르시아 씨의 비명을 듣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타들어가는 벤의 속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지금 경찰이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정황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경찰이 오고 있다는 말에 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도 현장을 보지 못해서 잘 몰라요. 그저 아랫집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서...”


“알겠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에 피해 계시고, 절대 사건 현장으로 가지 마세요.”


“안전한 곳...”


그제야 벤은 지금 자기가 있는 곳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범인이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맞닥뜨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위치였다. 곧 경찰도 온다고 했으니 벤은 오퍼레이터의 지시대로 일단 거기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계단을 내려가려고 몸을 돌린 그때, 아까와는 다른 성질의 비명이 들렸다.


“갸아! 갸아아아!”


마치 무언가를 목에 잔뜩 쑤셔 박히고 있는 가운데 얼마 안 남은 틈으로 내지르는 마지막 발악 같은 소리였다. 벤은 뒤를 돌아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경찰이 왔을 때는 너무 늦는 게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다리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벤은 마구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 구두 바닥이 딱딱한 계단을 때리는 감촉과 소리. 모든 것들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껴졌고,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폭발하듯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 어쨌든 조심하고 볼 일이야. 자네에게는 소피아가 있으니까.


‘이게 무슨... 어울리지 않는 영웅 행세야.’


쓴웃음을 지을 새도 없이, 벤은 아랫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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