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이면서도 남자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스산한 밤공기에 폐를 베인 것처럼 그의 가슴에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사람, 사람 살려!”
누구 하나 남자의 애절한 외침에 대답하는 이 없이, 창백한 보름달만이 그의 머리 위로 은은한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남자는 늦은 시간 그 자리에 있던 자신을 책망했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친 ‘그것’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절대 잡혀선 안돼. 잡히면.. 그걸로 끝이야.’
그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요동치는 내장과 이제 한계라고 울부짖는 다리를 다그치며 계속 달렸다. 어서 이 공원을 벗어나, 아무나 좋으니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이면 진작 공원에서 나갔어야 하지 않나?’
남자는 절대 돌아보지 말라는 본능의 명령을 거스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이제 그 분수대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공포가 극에 달해 감각이 이상해진 걸까. 제법 달린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분수대의 천사상 머리 위에는 여전히 ‘그것’이 시커멓게 악령처럼 붙어 있었다.
‘아직 있어!’
그는 온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다리를 더 빨리 움직였다. 눈을 떼면 금방이라도 ‘그것’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까 싶어, 남자는 차마 고개를 앞으로 돌리지 못했다.
그때 돌연 그의 앞에 거대한 암흑이 입을 벌렸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 안으로 뛰어들어간 그는 갑자기 변해버린 주변 풍경에 놀라 멈춰 섰다. 그리고 한없는 좌절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다시 분수대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아, 하아, 하...”
기껏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는데 다시 제자리라니. 그는 구조를 이해할 수 없는 미로에 영원히 갇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망에 빠져 있는 남자에게 검은 실루엣이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도망가도 소용없다고.”
남자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허망한 눈동자에 ‘그것’의 모습이 담겼다. 달의 총애를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하얀 머리카락, 유령처럼 창백한 피부, 그리고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회색 눈동자. 검은 후드 점퍼와 블랙진을 입고 있는 그것은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이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끝내자?”
천사상에서 뛰어내린 소년의 몸이 가뿐히 중력을 무시하며 천천히 내려왔다. 땅에 착지한 소년은 느긋하게 걸어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어디, 당신은 어느 쪽일까?”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가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어느 쪽, 이라니..?”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남자의 반응에 소년은 사신의 낫처럼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무릎에 얹고 있던 손을 들어 검지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소년 A라는 이름, 또는 이 얼굴. 뭐 아는 거 없어?”
“소년 A?”
NIS(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본부 건물 내 한 회의실. 건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넓은 회의실인 이곳에 있는 건 고작 사람 두 명과 노트북 컴퓨터 하나였다. 널찍한 타원형 테이블 상석에는 값비싼 검은 양복을 입은 노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역시 검은 양복을 입은 30대 초반의 여성이 서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 그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노트북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마치 그것이 위협적인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꽤 불특정한 이름인데?”
컴퓨터가 말하고 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딱딱한 음성이 노트북 내장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평소 중후함과 관록을 풍기던 노년의 남자는 소년 A라는 이름이 거론된 후 내심 불편한 모양인지 얼굴이 옹색해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이젠 더 이상 숨기거나 미룰 수 없는 상황.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네. 16세에 화려한 죄목으로 체포된 범죄자야. 미성년자라서 언론에서는 그렇게 불렀고, 스스로 원해서 그런 코드네임으로 굳어지게 된 걸세.”
“코드네임?”
“그는 체포 후 바로 우리 CSA(Cybersecurity Agency)에 영입됐어.”
남자는 다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옆에 선 여자는 상관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남자는 CSA가 한낱 이름 없는 조그마한 부서일 때부터 몸담아 왔으며, 이젠 그곳의 최고 책임자가 된 사람이었다. 30여 년 전 공식적으로 설립된 CSA는 엄밀히는 NIS의 하부조직이지만, 5년 전 갑자기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현재는 그 NIS 전체와 어깨를 나란히 견줄 정도로 성장했다. 그즈음 CSA에 발탁된 후 줄곧 남자를 상관으로 모셨던 여자는 그의 표정에서 깊은 고뇌를 읽어낼 수 있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주절주절 읊조리듯이 말을 이었다.
“근본이 그런지라 엄격한 감시 하에 비밀리에 활동했지. 그런데 실력이 부풀려졌던 건지 기대했던 것만큼의 활약도 없었던 데다, 계속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여서 결국 임무수행에 부적절하다는 진단을 받고 제명되었네. 제명 후에는 치료감호소에 보내졌고, 안타깝게도 거기서 스스로 목숨을...”
“결국, 토사구팽 당한 거구나?”
지극히 도발적인 상대의 발언에 남자가 눈을 부릅 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금방 눈을 내리깔았다. 대신 여자의 매서운 눈이 노트북 컴퓨터를 노려보았다. 자기 상관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은 데다, 나름 자긍심을 갖고 충성을 바치고 있는 조직에 대해 폄하 발언을 한 상대에게 그녀는 날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넘겨짚지 마시죠.”
그러자 컴퓨터 스피커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라? 지금 보고 있는데. 그 A라는 녀석의 기록.”
“A...? 그게 무슨... 몰라. 너도 오늘 처음 봤고...”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덜덜 떨었다. 얼마나 심하게 떨었던지 그의 윗니와 아랫니가 딱딱 부딪히고 있었다. 소년은 미소를 거두고 눈을 부릅 떴다.
“정말? 그럼 당신은 나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거네?”
“그래, 진짜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제발 보내줘어...”
울상을 짓고 애원하는 남자에게 소년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읏샤.”
하늘에선 구름이 달을 가리고 땅에 더 짙은 어둠을 내리었다. 소년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감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이번에도 필요 없는 쪽이네.”
“어..?”
소년이 눈을 뜨자 잔잔한 회청색이던 눈이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났다. 남자는 하얗게 질려 뒤로 물러나며 울부짖었다.
“사, 살려줘! 제발 누구 없어요!”
“‘보고 있다’고요?”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CSA에서 일한 지난 5년간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소년 A라는 자의 모든 기록은 분명 말소되었거나 기밀문서로서 엄중히 관리되고 있을 터였다.
‘NIS의 보안은 세계 최고 수준이야. 그런데 외부에서, 그것도 기밀문서에 들키지 않고 접근을? 말도 안 돼.’
줄곧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이 무례한 작자와의 대화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그녀는 내심 상대의 거짓 도발이 반가웠다. 이 실책을 꼬투리 잡아 당장이라도 한 방 먹여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그녀는 일단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안색이 흙빛으로 변한 남자는 까만 노트북 화면을 향해 신음 섞인 목소리로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네. 나라의 안보를 위해서 작은 희생은...”
“됐어. 당신네들을 그렇게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으면 정말로 화가 나버리니까.”
남자의 말을 잘라먹은 목소리는 갈수록 싸늘하게 변해갔다.
“난 어린애를 이용해 먹고 버린 당신 같은 인간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하지만.”
남자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상대의 말이 이어지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그걸 알고서 일부러 뜸을 들이던 목소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비스와는 인연이 있으니까. 개인적인 흥미가 생겨버렸네?”
의외로 긍정적인 전개에 남자는 입을 떡 벌렸다. 그는 노트북에 달린 카메라를 향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든지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알아낸 정보만 우리와 공유해 주면 돼. 우리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알려줄 테니...”
“글쎄? 방금까지도 태연하게 거짓말한 걸로 봐선 전혀 신뢰가 가질 않는데? 어차피 그쪽이 아는 거야 내가 캐내면 그만이고, 나한텐 별 이득이 없잖아?”
상대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있다는 모욕감에 여자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남자 또한 속으로는 배알이 꼬였지만, 일절 내색하지 않고 계속 목소리의 주인을 회유했다.
“그, 그럼 우리 인력을 빌려주는 건 어떤가? 자네가 원하는 만큼 우리 요원들을 동원시키도록 함세. 물론, 할 수 있는 한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는 한에서? 아하하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넓은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두 사람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런 놈 굳이 필요하겠냐고 그녀가 상관에게 따지려던 순간, 웃음소리가 뚝 끊기면서 짤막한 한 마디가 이어졌다.
“좋아.”
그 말을 끝으로 까맣게 죽어있던 컴퓨터 화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갸아아아... 갸르르...”
안에서부터 까맣게 타들어가는, 한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던 것을 바라보며 소년이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아니었나.”
숯검댕이 같은 물체들도 이윽고 전부 사라지고, 평균 신장의 남자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소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분수대를 등지고 유유히 걸어갔다. 그는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름답네.”
달처럼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 흠집 같은 비웃음이 서렸다.
“벤, 잘도 이런 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검은 그림자에 휩싸여 사라졌다.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천사상의 눈만이 텅 빈 공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녀석, 정말 멋대로 하도록 둬도 괜찮은 걸까요?”
여자가 파란 노트북 화면을 흘겨보며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 현재 우리가 가진 최상의 카드니까.”
남자는 긴장이 풀린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풍채 좋은 널따란 등이 밀어대자 의자가 삐거덕 소리를 냈다.
“다행히 흥미를 보이는 것 같으니 우리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달려들겠지.”
“믿을만한 자입니까?”
“실력만큼은.”
남자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요망한 아비스를 궁지에 몰아넣었을 정도의 실력자라네. 워낙에 잘 숨겨서 진짜 실력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어쩌면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위자드 갓(Wizard God)’의 칭호를 받을 만한 인물일지도 몰라.”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삼켰다. 위자드 갓이라니,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해커 최고 레벨의 호칭이지 않은가.
“그자, 아르고스(Argus)와의 연락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알아서 오겠지. 필요하면.”
“그렇게 여유 부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일반 시민들의 피해가...”
“일단은 상황 파악이 우선이네. 섣불리 일을 크게 벌였다간 자칫 소년 A에 대한 얘기가 세간에 퍼질 수도 있어. 벼룩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여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게 벼룩이라면 말이지.’
이 조직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거나 충성심이 흔들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한 선 따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더 큰 선을 위해,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때론 악이 필요하다는 것도.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선 자신의 손쯤이야 기꺼이 더럽힐 각오로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자괴감이 밀려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크고 더러운 비밀에 비하면 벼룩처럼 작고 하찮을 뿐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달빛이 스며들어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 색으로 물든 예배당. 하얀 수녀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기도를 올리듯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읊조리고 있었다.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시스터(Sister).”
그 뒤로 홀연히 한 인영이 나타나 그녀를 불렀다.
“‘늑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마도,”
“아마도, ‘그 자’ 때문이겠죠.”
“... 예. 이대로 계속 두고 보실 겁니까?”
여자가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뒤로 돌았다. 달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
“우리 ‘어린양’은 어쩌고 있습니까?”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무지개 너머 어딘가, 하늘은 푸르고, 그대가 감히 꿈꾸던 꿈들이 이루어지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