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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is Dec 25. 2024

프롤로그

M.K., 이는 당신의 연기에서 얻은 영감으로부터 태어난 이야기입니다. 

전해지지 않을 감사를 떠나보내며, 부디 이 또한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미국 미시간 주의 도시 디트로이트. 한때 세계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였던 영광은 과거에 묻힌 채, 지금은 불황이 할퀴고 간 생채기 위에 온갖 악명과 오명이 흉터처럼 붙어 있는 곳. 

그나마 중산층이 거주하고 있는 교외 지역은 상황이 나은 편이지만 시내, 특히 구시가지에는 떠날 여력조차 되지 않아 남아 있는 빈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건물들은 마치 화쇄류를 맞고 순식간에 산 채로 석상이 되어 버린 고대 도시 폼페이처럼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중 하나, 여느 버려진 집들과 별다를 것 없는 어느 건물 안. 원래는 가게나 사무실로 쓰려고 만들었는지 안쪽에 위치한 작은 방 말고는 공간을 구분 짓는 벽 하나 없이 뻥 뚫린 구조로 되어 있었다. 밖이 쇠창살로 막혀 있는 창문은 오랫동안 열지 않아 먼지가 가득 쌓여 있고, 감출 것이 많은지 창문 유리에는 회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벽과 잘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창문이 그 모양이니 환기가 될 리 없는 실내에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에서 돌기만 하다가 탁해진 공기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 어둑하고 음침한 공간 한가운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새카만 후드 점퍼와 블랙진, 신발 끈조차 검은색인 블랙 스니커즈. 거기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그 뒷모습은 마치 그림자가 바닥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올블랙인 의상이 미처 가리지 못한 그의 신체 부위만이 그가 그림자가 아니라는 유일한 증명이었다. 평생 햇빛 한 번 보지 않은 듯 창백할 정도로 하얀 손, 그리고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 흰머리 때문에 얼핏 보면 나이 많은 노인으로 착각할 수 있겠으나, 그의 얼굴은 16세 소년의 것이었다. 손만큼이나 창백한 얼굴과 회청색 눈동자는 앞에 놓인 노트북 컴퓨터를 향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까만 노트북 화면을 꼼짝 않고 바라보고 있던 소년은 이윽고 천천히 일어나 멀찍이 놓인 유리병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세련된 디자인의 라벨이 둘러져 있는 투명한 병을 집어 들고 다시 아까 그 자리로 돌아와 병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노트북 위에 부었다. 세상에서 가장 독한 술 중 하나인 에버클리어(Everclear). 알코올 도수가 95%에 달하는 투명한 액체가 출렁출렁 춤을 추며 까만 노트북 위로 떨어졌다. 

병을 다 비운 소년은 입고 있는 검은색 후드 점퍼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라이터를 켰다. 칙. 칙. 칙. 낡은 라이터는 보잘것없는 스파크만 내리 세 번을 토하다가 마침내 작은 불꽃을 피워냈다. 구름 낀 겨울 하늘 같은 소년의 눈에 주홍 불빛 두 개가 태양처럼 떠올랐다. 잠시 불꽃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은 앞으로 하려는 일의 위험성이나 결과 같은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 망설임 없이 라이터를 노트북 위로 떨어뜨렸다. 화르륵. 금방 꺼질 것처럼 위태롭던 작은 불꽃은 악마와 계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맹렬히 타올랐다.  


소년은 불타는 노트북을 뒤로하고 방으로 걸어갔다. 방안에는 마땅한 가구 하나 없이 있는 거라곤 더블사이즈 매트리스 하나가 전부였다. 매트리스 위에는 소년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한 소녀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다듬었다. 그런 다음 세상에서 제일 연약한 흰 꽃잎을 가위손으로 만지듯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한 번 어루만졌다. 깊이 잠들었는지 소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무지개 너머 어딘가, 하늘은 푸르고, 그대가 감히 꿈꾸던 꿈들이)...” 


쾅! 그때 굳게 잠겨있던 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고, 무장한 FBI 수사관 네 명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FBI다! 꼼짝 마!” 


“콜록콜록! 뭐야 이 냄새는... 불? 컴퓨터!” 


“증거를 없애려 한 건가!” 


“얼른 불을 꺼!” 


“놈은 어디 있지?” 


“저쪽, 좀 더 안으로 들어가!” 


수사관 둘은 불을 끄려고 노트북에 달라붙었고, 나머지 둘은 매캐한 연기를 헤치며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방으로 향한 두 사람은 머지않아 앉아 있는 소년의 뒷모습과 누워 있는 소녀를 찾아냈다. 상대가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소년과 소녀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천천히 손들고 일어서! 허튼짓 하면 쏜다!” 


소년은 시키는 대로 손을 들고 일어났지만 소녀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소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소녀의 창백한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이, 저 여자애 혹시...” 


천천히 돌아선 소년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 얼굴을 본 수사관들은 훗날 이때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라고.   





[용의자: 샌디 던(Sandy Dunn). 16세.

검거 시 이미 사망. 부검 결과 사인은 약물 과다 투약. 

불법 약물 소지 외 혐의 없음.]    


[용의자: 통칭 A. 이름 불명. 나이 불명. 신원 조회 결과 기록 없음. 그의 모친이라 알려진 여성은 그와의 관계를 부정. 인근 주민의 진술에 따라 16세로 추정. 

지난 3년간 있었던 개인 정보의 해킹, 무단 도용, 사기 행각의 주범으로 지목된데 이어 샌디 던 살해 혐의 추가. 블랙 해커 아비스(Abyss)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됨. 벤 아담슨(Ben Adamson)이라는 가명을 쓰며 빈민가에 숨어들었던 아비스를 목격한 주민 두 명이 A가 아비스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증언. A가 범죄에 사용한 크래킹(cracking) 기술에 아비스와 비슷한 점이 발견됨. 

불투명한 정체와 아비스와의 교류 가능성을 고려하여 잠재적 위험성에 주목, 최고 위험등급으로 분류. 추후 특별 조치가 취해질 예정.] 


“잠재적 위험성이라... 훗, 날카로운 칼은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지.” 


푹신한 사무실 의자에 앉은 한 노년의 남성이 보고서에 적힌 키워드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보고서 좌측 상단에 인쇄되어 있는 소년의 사진에 대고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파이면서 선명한 음영의 선을 그었다. 동그란 안경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차가운 그의 눈은 마치 뱀의 그것처럼 섬뜩한 빛을 띠었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힘들면 쓰고 버리면 그만. 기록도 없다니 지울 것도 없고 편하군.” 


그는 다 읽은 보고서를 책상 밑에 놓인 분쇄기에 넣었다. 지이잉. 분쇄기는 종이에 무슨 내용이 적혔든 관심 없다는 듯이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며 보고서를 갈아버렸다. 

소년의 사진도 분쇄기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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