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광원이었던 컴퓨터 화면이 잠들고, 불 꺼진 방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방안에는 서른 중반의 남자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방금까지 보고 있었던, 이제는 보이지 않는 모니터를 계속 응시했다. 눈에는 아무런 상도 맺히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뻐근한 피로감이 몰려와 남자의 목과 어깨를 눌러대었다. 그는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망설임 없이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흐트러진 진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부드러운 중저음에 영국 억양이 섞인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블랙 해커 아비스’라... 벌써 12년이 흘렀나.”
분명 저 앞에 벽이 있고 천장이 있을 텐데도 어둠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나 감으나 여전히 똑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한 얼굴을 떠올렸다. 어울리지 않는 산골 생활에 엉망이 된 갈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증오로 가득 찬 초록색 눈동자, 검붉은 피로 물든 이를 훤히 드러내던 섬뜩한 미소. 마지막 순간 ‘아비스’는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 두고 봐. 언젠가 내 망령이, 네 업보가 널 찾아내 네 등에 칼을 꽂을 테니.
“... 절묘한걸. 진짜 그 말대로 되려나 보네.”
남자는 아까 CSA의 기밀문서에서 보았던 A의 사진을 떠올렸다. 하얀 머리카락에 창백한 얼굴, 회청색 눈동자. 아마 밤에 봤다면 간담이 서늘했을, 마치 유령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어서 그는 CSA가 A에게 어떤 임무를 맡겼는지,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떠올렸다. 아비스가 발굴하여 키운 인재인 만큼 A는 성공리에 ‘비밀 임무’를 소화해 냈고, 덕분에 CSA는 지금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알려졌다간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일 정도로 더러운 비밀, 그리고 그걸 감추기 위해 CSA가 A라는 소년에게 가한 잔혹행위.
남자, 아르고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모니터 쪽을 향해 물었다.
“아직도 ‘벤’을 원망하고 있나? 그래서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거야?”
과거의 오명을 씻고 새로이 태어난 도시, 그 동쪽 언저리에 위치한 고층 빌딩 꼭대기에 소년이 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휘이이- 변덕스럽고 거센 바람이 소년의 부드러운 백발과 검은 옷자락을 마구 흔들어댔다.
“... 스읍, 하아. 아무 맛도 안 나네.”
101층의 아찔한 높이도 아랑곳 않고 소년은 옥상 난간 위에 서서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바라보았다. 지평선이 붉게 물들고 다홍색과 분홍색, 보라색이 하늘에 번져나가더니 곧 나른함이 섞인 푸른빛이 모든 걸 밀어내었다. 소년은 창백한 하늘 아래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잠에서 깬 거리가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저게 그토록 갈망하던 평범한 삶인가...”
소년의 회청색 눈은 딱히 갈 곳을 알지 못한 채 바삐 거리를 더듬었다. 모래사장 어딘가에 묻혀 있을 바늘을 찾는 것 같은 좌절감과 절박함이 그의 눈동자에 얽혀 있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무지개 너머 어딘가, 하늘은 푸르고, 그대가 감히 꿈꾸던 꿈들이 이루어지는 곳)...’
- 날... 기억해 줘요.
‘... Someday I'll wish upon a star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언젠가 난 저 별에 소원을 빌고, 구름 저 너머에서 눈을 뜰 거예요)......’
♩♪♪♩♪♪ ♪♪♪♪ ♪♪♪♪
6시 정각을 고하는 알람 소리, ‘요한 파헬벨’의 “캐논(Canon)”을 들으며 벤은 눈을 떴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꿈의 여운을 찾아 헤매었다. 이윽고 그는 꿈이 끝나고 삶이 이어졌음을 받아들이며, 깊은숨과 함께 아쉬움을 삼켰다.
“... 스읍, 후우.”
그의 팔이 익숙한 침대보의 감촉을 가로질러 아직 온기를 품고 있는 이불을 열어젖혔다. 벤은 일어나 앉아서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아내의 사진에 인사를 했다.
“안녕, 여보? 잘 잤어?”
아내는 이번에도 그의 꿈속에 찾아와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마지막 유언으로 그런 말을 남긴 그녀의 마음이 어땠을까. 벤은 아내의 사진에 가볍게 키스했다.
세수를 하러 욕실에 간 벤은 잠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다 일어나서 부스스한 갈색 머리, 살짝 처진 녹색 눈. 너무 익숙해서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다 씻고 나서 벤은 부엌으로 갔다. 그는 구운 식빵에 대충 잼과 피넛 버터를 바르고 입에 구겨 넣었다. 단숨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도시락을 싸려는데, 적적한 게 싫어서 틀어 둔 라디오에서 공익광고가 나왔다.
“우리의 안전과 삶을 위협하는 테러행위. 수상해 보이거나 낯선 사람이 있으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시고, 절대 직접 상대하지 마십시오.”
새로운 일도 좀처럼 없는 평화로운 도시인데, 대체 어디서 테러가 일어났다는 걸까. 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다른 준비를 모두 마치고 평소 즐겨 입는 회색 양복을 입으니 정확히 7시였다. 벤의 집은 5층 아파트의 딱 중간인 3층에 위치해 있었다. 벤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늘 같은 시간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아랫집 아저씨와 마주쳤다.
“어이쿠, 벤. 좋은 아침.”
희끗희끗한 검은 곱슬머리에 불그스름한 볼. 웃는 인상이 푸근한 좋은 이웃이다.
“안녕하세요, 가르시아(Garcia) 씨. 좋은 아침입니다.”
아파트에서 나온 벤은 서둘러 열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7시 40분, 오늘도 예정된 시각에 병원에 도착한 그는 막 인수인계를 마친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모든 간호사와 친하지만, 그중 사교적인 패트리샤(Patricia)와는 유독 더 가까웠다.
“안녕하세요, 팻(Pat). 어제저녁에 보고 또 보네요. 이제 퇴근하시는 건가요?”
“벤! 아 참, 오늘 수요일이었죠.”
“네. 우리 소피아(Sophia)는 밤새 별일 없었죠?”
“그럼요~ 천사처럼 잘 잤어요. 기다리겠어요, 얼른 가보세요.”
“네, 그럼.”
이젠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딸의 병실.
“안녕, 엔젤? 오늘도 정말 예쁘구나.”
볼을 어루만지며 인사를 해도 딸 소피아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그랬다. 딸은 1년째 의식불명 상태다.
딸이 봐주지 않아도 벤은 한결같은 미소를 머금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보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예쁜 딸. 그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곧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미안, 엔젤. 오늘은 엄마와 함께 저녁을 보내야 하는 날이야. 이해해 줄 거지?”
그는 대답 없는 딸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병실을 나섰다.
벤은 시청에서 데이터 분석가로 일하고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시청은 병원과 가까웠다. 8시 40분경에 시청 건물에 도착한 벤은 보안장치를 통과하며 경비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채드윅(Chadwick).”
“좋은 아침입니다, 벤.”
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풍채 좋은 옆자리 동료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여어, 벤. 좋은 아침.”
“여어, 기포드(Gifford). 오늘도 아침부터 도넛이야?”
“그럼~ 뇌는 당분을 에너지원으로 쓰니까. 내 뇌를 위한 브레인 푸드를 챙겨줘야지.”
매일 그랬듯이 기포드의 책상 한구석에는 커다란 도넛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설탕으로 코팅된 도넛들이 들어 있었다. 12개짜리 상자인데 8개만 남은 걸 보니 그새 4개를 먹은 모양이었다. 기포드는 도넛 하나를 집어 두 입만에 먹어치웠다. 매번 보는 장면인데도 벤은 아직 적응이 안 되었다. 그는 불뚝 튀어나온 기포드의 배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셔츠에 달린 단추가 조만간 파업을 선언할 것만 같았다.
“소피아는 좀 어때?”
“똑같아.”
“그래... 적어도 나빠지진 않았으니까.”
“응.”
언제부터인가 기적을 기대하지 않는 인사를 나눈 뒤, 곧 두 사람은 업무에 빠져들었다. 일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묘하게 한가하다 싶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일이 날아왔고, 그 일을 처리하고 나면 하루가 훌쩍 가있었다. 너무 바빠서 일에 치일 정도도, 너무 한가해서 지루할 정도도 아닌, 늘 적당한 업무량이었다.
어느새 찾아온 퇴근 시간. 기포드가 텅 빈 도넛 상자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오늘은 데이트 있는 날이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벤에게 그는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는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셀윈(Selwyn)한테 안부 전해줘.”
“응.”
기포드가 먼저 퇴근하고, 남은 업무를 끝낸 벤은 자리를 뜨면서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꼭 잰 것처럼 정확히 7시였다.
벤은 먼저 아내와 자주 가던 공원으로 향했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에 붉은 물이 들고, 끝나가는 하루의 단상이 그 위에 보랏빛을 덧칠했다. 그는 벤치에 앉아서 한때 아내와 둘이서 보던 광경을 혼자 지켜보았다.
그때 그의 앞으로 한 여자가 조깅을 하며 지나갔다. 복숭아 향이 스치고, 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슬슬 다음 장소로 옮길 시간이다 생각하며 그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음 장소는 아내를 처음 만난 칵테일 바, 문 버스트(Moon Burst)였다. 수요일마다 벤이 오는 걸 알고 있는 웨이트리스 제니(Jenny)는 센스 있게 그의 자리에 예약석 표시를 해두었다. 자리로 안내받으면서 벤은 바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사장이자 바텐더인 셀윈이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를 했다. 벤도 자리에 앉으면서 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주문은 평소대로 하시겠어요?”
“네.”
제니는 주문을 전하러 바테이블로 향했다. 옆으로 한데 묶어 올린 금발이 그녀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발랄하게 흔들렸다. 벤은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의 거리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문한 음식은 금방 나왔다. 벤의 자리에는 맥주 한 잔이, 맞은편 아내 자리에는 감베로니 파스타가 놓였다. 제니는 특별히 아내를 위해 예쁜 물망초 꽃이 그려진 일회용 잔 받침을 놓고서, 그 위에 보랏빛 칵테일이 담긴 유리잔을 올렸다. 벤은 그녀의 친절함에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다시 혼자 남은 벤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테이블 한가운데 있는 촛불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검은 드레스를 입은 단역 무용수처럼 짧은 춤을 추고 퇴장했다. 한참 아내를 향한 혼잣말을 속으로 삼키고 나서야, 벤은 물기가 흥건한 맥주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그때 셀윈이 벤과 그의 아내를 위한 곡, ‘프린스(Prince)’의 “퍼플 레인(Purple rain)”을 틀었다.
“I never meant to cause you any sorrow (절대 당신에게 어떤 슬픔도 주고 싶지 않았어).
I never meant to cause you any pain (절대 당신에게 어떤 아픔도 주고 싶지 않았어).
I only wanted one time to see you laughing (그저 단 한 번만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I only wanted to see you laughing (그저 당신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어).
In the purple rain (보랏빛 비 속에서).”
노래가 끝나고,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 셀윈이 벤에게 다가왔다. 그는 다른 빈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실례합니다. 합석 가능할까요?”
벤이 피식 웃으며 얼른 앉으라고 손짓하자, 셀윈은 앉으면서 아직 손도 대지 않은 파스타를 보고 말했다.
“우리 주방장이 보면 울겠어.”
“밥(Bob)의 요리는 식어도 맛있어.”
벤은 얼른 파스타 접시를 앞에 가져다 놓고 먹기 시작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파스타는 정말 맛있었다.
“언제 먹어도 훌륭한 맛이야.”
감탄하는 벤에게 셀윈이 털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주방장을 붙잡아 두는 사장도 대단하고 말이지.”
“그러네. 주방장 요리 솜씨도 훌륭하고, 웨이트리스도 예쁘고 친절하고, 사장 겸 바텐더도 잘생겼고. 점점 인기가 많아져서 나 같은 건 단골 명함도 못 내밀게 될지도?”
셀윈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생각만큼 머리카락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뼈가 있는 말이네. 10년간 매출이 제자리걸음인데.”
“적어도 나빠지진 않았으니까,라고 말한 기포드가 자네에게 안부 전해달래.”
“역시 기포드. 그렇게 뇌한테 밥을 주더니 그래도 제법 쓸모 있는 말을 하잖아.”
둘이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음악이 멈추고 아침에 들었던 공익광고가 나왔다.
“우리의 안전과 삶을 위협하는 테러행위. 수상해 보이거나 낯선 사람이 있으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시고, 절대 직접 상대하지 마십시오.”
“저 광고 자주 나오네. 수상한 사람은 둘째치고 낯선 사람도 드물지 않아, 여긴?”
벤의 물음에 셀윈은 이번엔 짧은 수염이 뾰족 올라온 턱을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테러니 뭐니보단 매일 면도를 해도 저녁이면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수염이 더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보기 좋게 근육이 붙은 몸, 구릿빛 피부, 남성미를 풍기는 각진 얼굴, 웨이브 진 흑발. 여기에 수염이 좀 나있어도 꽤 어울린다고 벤은 생각했지만, 깔끔한 성격의 셀윈은 그런 걸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벤이 파스타를 마저 다 먹고 포크를 내려놓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쨌든 조심하고 볼 일이야. 자네에게는 소피아가 있으니까.”
시간이 점점 무르익고, 밤공기에 취한 손님들이 바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슬슬 자리를 비워줘야겠다 싶어 벤은 제니에게 계산서를 부탁했다.
“벤한테 돈 받으면 사장님한테 혼나요.”
이번에도 한사코 안 받으려는 제니에게 벤은 미리 계산해 둔 밥값과 술값, 그리고 팁까지 더해서 돈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한창 바쁜 셀윈을 한번 돌아보고는 가게를 나왔다.
꽉 채워졌던 잔이 점점 비어가듯, 며칠 전 만월이었던 달이 기울고 있었다. 벤은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띠고 익숙한 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끝까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요일이었다.
아파트에 도착한 벤은 계단을 올라갔다. 집 앞에 이르면 손에 익은 손잡이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문을 열고 들어가, 어디를 밟으면 삐걱 소리가 나는지 다 알고 있는 거실 마루를 지나서, 너무 넓은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