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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해서 아이스크림을 샀어.

불쌍한 엄마는 되고 싶지 않은데 말이죠.

by Outis

'아, 몸이 무겁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글도 써야 하고... 걍 내일 할까? 에이, 그래. 이거 하나만 하자.'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하나하나 집안일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챙겨 먹기 귀찮은데, 그냥 넘어갈까나. 그런데 머리가 핑 돈다. 아, 맞다. 입맛이 없어서 어제 저녁도 걸렀지. 아침은 막내가 남기고 간 빵과 커피로 때웠다. 아무래도 지금 밥 거르면 나중에 손 덜덜 떨면서 후회할 거 같아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후훗, 머릿속에는 이미 빅 픽쳐가 있다. 그저께 막내가 먹다 남긴 콩나물밥이랑 어제 남은 볶음밥을 한 그릇에 부어서 전자레인지에 데운 다음, 아직 못 끝낸 무생채랑 계란 프라이를 넣고 비벼 먹자. 위잉. 삑-삑-삑-! 모락모락 김이 나는 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식탁 앞에 앉았다. 역시, 생각대로 맛 궁합이 나쁘지 않다.


문득 앞에 놓인 김통이 눈에 띈다. 그래, 김도 같이 먹으면 더 맛있을 거 같은데. 나는 김에 싼 볶음밥과 무생채를 야무지게 한 입 먹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조미김은 애들이 워낙 좋아하는 반찬인 데다, 부피에 비해 가격이 높은, 여기서는 나름 고급 수입 상품이다. 애들이 잘 먹으니 나도 남편도 보이면 사 오긴 하는데, 맘 편히 먹기에는 부담스럽다. 나라도 덜 먹어서 아껴야겠다,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언제 날 잡아서 생김을 구워 놔야지, 그래서 좀 맘껏 먹어 보자. 생각만 벌써 몇 달째, 실천은 아직 요원하다.


나는 반투명한 플라스틱 통 안에 든 김을 자린고비 굴비 보듯이 쳐다보며 한 끼를 때웠다. 자리에 앉은 지 5분. 빈 그릇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비죽비죽 웃음이 나왔다. 따끈한 우동 한 그릇냉동고에 든 아이스크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이 사이좋게 손잡고 가는 걸음걸음마다 철없는 어머니의 레전드 어록들이 방울방울 떠올랐다.



1. 불쌍해 보이고 싶은, 불쌍하신 우리 어머니


평생 채워지지 않은 인정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계신 어머니는 불쌍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셨다. 누가 좀 당신을 동정하며 위로해 줬으면 하고 바라셨다. 경제력이 0에 수렴함에도 어머니는 용감무쌍하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차라리 네 아빠가 죽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다들 날 불쌍하다고, 남편 없이 애 키우느라 고생한다고 동정해 줄 텐데. 너희도 나한테 '우리 엄마~ 우리 엄마~' 할 텐데."


어머니는 한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너무 불행하게만 자라셔서 그런가, 정상은 아니셨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언행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나는 어머니와 거리를 두었고,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그러는 걸 유독 서운하게 생각하셨다. 내가 아버지를 닮아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어서 그런다고 날 비난하셨다. 실제로 아버지의 'T발 놈' 유전자를 찐하게 물려받은 나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화가 폭발할 때마다 괜히 같이 잔소리를 얻어먹었다. 그와 더불어 나는 종종 아버지와 비슷한 성향의 소유자이시자, 어머니의 세계관에서 최악의 빌런인 외할머니에 강제 빙의당해 혼나곤 했다.


"나한테 더 이상 바라지 마. 나도 우리 엄마한테 (사랑) 받은 게 없어서 줄 게 없어."


가만, 그럼 받은 게 없어서 줄 거 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머니가 무심코 던지신 한 마디 한 마디는 불길한 예언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궁상맞은 엄마를 욕하면서 닮은 주제에, 나는 그만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말았다.



2. 우동 한 그릇과 눈물 한 바가지


막연하게 '괜히 남 피해 주지 말고 혼자 살아야겠다.' 생각하던 나는 순간 뭐가 씌었는지 평생 안 떠날 줄 알았던 조국까지 버리고 외국으로 시집을 갔다. 당시에도 자학을 일삼던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외국 생활이 '나약하고 게으른 자신을 채찍질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던가.


"내가 지금껏 살아보니 일을 해야겠더라고. 집에서 살림만 하니까 이 나이 돼서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렸어. 애는 내가 봐줄 테니 너는 일 해."


동기부여의 끝판왕이신 시어머니 덕분에 나는 대단하게는 아니어도 고만고만 학업과 경제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대학원 졸업하고 첫 직장에 취업, 계약 끝나자마자 첫째를 낳고 새 직장에 취직, 그리고 몇 년 후 둘째를 가졌다. 줄곧 시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어서,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봐주신 덕분에 나는 둘째까지 출산하고서도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다. 웬만해서는 맞추기 어려운, 강하면서도 섬세한 성격을 가지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처음엔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살다 보니 "왁!" 하시면 넙죽 엎드려 고비를 넘기는 요령도 생겼고, 어쨌거나 감사한 점도 많았다.


얼마 안 되는 공무원 월급이라 생활비, 시부모님 용돈까지 드리니 수중에 남는 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커피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차곡차곡 모았다. 가끔은 사 먹기도 하는 사치를 자신에게 허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둘째 임신하고서부터였다. 아니 이 녀석이 자꾸 우동이 먹고 싶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그냥 우동이 아니라 새우튀김 우동이! 직장 근처 일식집에서 파는 우동은 가끔 사 먹던 팔라펠이나 샌드위치, KFC 버거에 비하면 가격이 센 편이었다. 이젠 "다들 손주 봐주면서 돈 받는다더라. 나도 받아야겠다." 선언하신 시어머니께 뒤늦게 수고비도 드리고 있던 참이어서 더더욱 여유가 없는데, 어쩐다..


'그래, 애 가질 때만 쓰는 건데 뭘. 그동안 아꼈는데 지금 좀 쓰면 어때?'


죄책감을 동반한 일탈의 쾌감. 그때만 해도 조심조심 우동 사 먹는 일이 그렇게 서러운 건 줄 몰랐다. 육아 휴직을 하면서 도중에 급여가 끊긴 내게 (그 와중에 가전제품은 또 왜 그렇게 고장이 나는지), 잔고가 많이 없다고 사정해도 지금껏 낸 만큼 돈을 계속 내놓으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까진. 복직할 때 교통비도 없어서 회사에서 빌려주는 돈으로 다니기 전까진.


튀김 기름이 둥둥 떠있는 우동 국물처럼, 그간 참고 산 세월이 서러움으로 얼룩져 갔다.



3. 실은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산 건 아니고요..


며칠 전 마트에 따라온 첫째가 먹고 싶다며 고른 아이스크림바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 이후로 자꾸 그 맛이 아른거렸지만, 또 사러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달리 살 게 있어서 마트에 갔는데, 아니 그 아이스크림이 세일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한참을 냉동고 앞에서 망설이다가 애들 핑계를 대며 두 박스를 집어 왔다. 한 박스에 3개밖에 안 들어 있으니 두 박스는 있어야 한다면서.


지금 냉동고에서 콜드슬립 중이신 아이스크림. 다섯 명이 하나씩 먹으면 하나가 남는 아이스크림. 5년째 전업주부로 땡전 한 푼 못 벌고 있는 나는 언감생심 내 손으로 먼저 박스를 뜯지는 못하고 있다.


딱히 엄청 절약하는 스타일도 아닌 주제에 왠지 자신에게 쓰는 돈에는 인색해진다. 이러다가 나중에 설움이 폭발하지는 않겠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혼자서 열폭할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래, 아이스크림바. 우울한 김에 하나 슬쩍...



"아, 애들 데리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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