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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곶사슴 Mar 11. 2020

가끔은 연장 탓을 해야 한다.

과자 굽다가 하는 헛소리


 나는 정말이지 상태가 영 좋지 못한 오븐을 쓰고 있었다.

 

 사실 말이 오븐이지 토스트기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성격의 기계였다. 위아래에 열선이 달려 있고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었던 기계. 그 와중에 타이머 다이얼이 부러져서 고정시켜버린 뒤 콘센트를 꼽고 뽑는 것으로 타이밍을 조절하던 기계.


 베이킹의 신이 있어서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짓는다면 '이런 도구로 베이킹을 했다는 이유'로 지옥에 던져버릴 것만 같은 기계.


 그래서 내가 만드는 과자의 품질은 그때그때 달랐다. 어느 날은 굉장히 맛있는 녀석이, 어느 날은 충격적으로 망가진 무언가가 튀어나오기도 했는데, 늘 바꿔야지 생각은 하면서 취미에 돈을 많이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로 꿋꿋이 버티고 있었더랬다.



 베이킹은 작업실에서 한다. 말이 작업실이지 '아지트'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의 빈 사무실 공간을 친구들끼리 개조해 이런저런 작업도 하고, 빔 프로젝터로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서 쓰고 있다.


 멤버 중 한 명이 SNS에 업로드한 아지트 건설기가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왔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PD들은 다 허물어져가는 공간을 그럴듯한 놀이공간으로 꾸며놓은 것에 감탄하면서도 재미있는 그림을 담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간에서 재밌는 것을 찍을 수 없으니 친구들끼리 왁자지껄하게 즐겁게 노는 장면을 찍으려고 해도 원래 조용조용한 사람들이 갑자기 그런 행동을 보이니 찍을수록 어색한 그림이 만들어질 뿐이었다. 뭐라도 카메라에 담아 가야 방송 분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PD들의 눈에 자주 쓰는 것처럼 밖에 나와 있는 오븐은 눈에 더 띄었을 것이다.


“이거 쓰시는 거예요? 여기서 뭐 빵 같은 것도 구우세요?”

“그렇긴 한데 지금 뭘 만들 수가 없어요. 기계 상태가 좀 안 좋거든요. 버터도 없고...”

“제가 장 보는 비용 좀 드릴 테니 뭐 만드는 장면 좀 찍을 수 없을까요?”


 헐레벌떡 마트로 뛰어가서 밀가루와 버터를 사 와 스콘을 구웠다. 급하게 하는 거라 계량도 제대로 못한 탓에 반죽도 엉망으로 나왔는데 구워져 나온 스콘은 한쪽은 타고 한쪽은 덜 익은 영 좋지 못한 모양으로 완성되었다.  PD는 망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대로 잡아야 한다며 근접샷까지 찍어가며 이미 망해버린 스콘의 몰골을 진지하게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은데 이거 내보내기 좀 그렇지 않을까요?”

“에이~ 잘 편집해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며칠 뒤 방송에는 처참한 상태의 토스트기에서 처참한 결과물을 꺼내는 모습이 여과 없이 방영되었다. PD가 베이킹을 안 해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뭐 때문에 촬영비 한 푼 안 받으면서 그렇게나 열심히 장을 보러 뛰어다녔을까.


 그 수치심을 잊지 못한 나는 새 오븐을 사버렸다.



 온도조절도 되고 큼지막한 창문도 달리고 디자인도 예쁜데 주머니 사정에 맞는 것으로 고르고 또 고르고 결제 버튼 앞에서 왔다 갔다를 몇 주 반복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쿠키를 구워보니 잘 구워진다. 빵 비슷한 것을 구워도 잘 구워진다. 오븐이라는 건 스콘 말고 다른 것도 구울 수 있는 것이었구나. 반죽이 잘 안 되어도 어떻게든 심폐소생술을 해볼 수 있는 물건이었구나.


결과물이 예쁘게 잘 나오니 욕심이 생겨서 자꾸 새로운 것을 찾아보고 만들어보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주변 사람 만날 때 몇 개 싸가서 상대의 반응을 구경하는 것도 퍽 기분 좋은 일이니 말이다.


작업실에 작업하러 간다던 애가 맨날 과자 부스러기를 만들어 오니 어머니는 물어보셨다.


“안 한다더니 카페라도 열라고 하는 거야?” 


 카페 창업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 고물 오븐으로 스콘을 몇 번 구워보고는 크게 실패해 ‘역시 내 길이 아닌가 보다’라며 접었던 적이 있다. 그때 사용하던 도구가 이런 종류의 물건이었다면 어땠을까. 왜 나는 장비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


저런 장비로도 어떻게든 되긴 하니까 그렇지.

가끔 성공이라는 것도 하니까 그렇지.




‘서투른 목수가 연장 탓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도구나 환경 탓을 운운하면서 핑계 대는 모습이 꼴사나워서 생겨난 말이겠지만, ‘남 탓’을 금기시하는 자세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파악하기보다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을 미덕으로 만들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꼭 베이킹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박봉에 야근을 밥 먹듯 하지만 직장을 바꿀 생각은 하지 못한다거나.

일의 능률도 떨어지고 분위기까지 망치는 팀원을 정리하지 못한다거나.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인간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삶의 활력을 빼앗긴다거나.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콘텐츠를 계속 만들면서 혼자 지쳐버린다거나.


 도구를 버리거나 바꿀 결심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더 좋은 도구를 손에 넣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그것이 나의 결과물을 바꿔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법이다. 어쩌면 환경이나 도구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실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가끔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고급 제품을 사도 비싼 모델에만 달려있다는 부가기능을 평생 써보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오히려 전에 쓰던 것과 다른 사용방법 때문에 적응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다. 안 좋은 물건이 왜 안 좋은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을 보완한 제품을 써봐야 한다. 아주 나쁜 것을 써 본다면 더 완벽해진다. 그래야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장비가 아니라 좋은 장비와 그렇지 않은 장비를 파악하고 나에게 맞는 도구를 찾아내도록 해주는 경험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연장 탓을 하자.

더 좋다는 것, 새로운 것을 일단 겪어보자.

진짜 고수는 연장을 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연장의 특징을 잘 잡아내는 사람이다.


... 라고 말하면서 나는 오늘도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물건들을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실패할 여유가 없는 삶은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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