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타이머 (하)

타이밍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

by 곶사슴


일훈의 연애 고민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해결되고 있었다.

모든 것은 타이머가 시키는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일훈은 그녀에게 시간표를 물어보았고

같은 과목은 같은 시간의 것으로 맞춰지게 되었고

수강신청을 함께 하자며 이른 아침에 만나게 되었고

한 학기 내내 함께 다니며 밥을 먹게 되었고

두 사람만 알고 있는 사실이 많아졌고

주말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가게 되었고

사귀자고 이야기하기 전에 손을 잡았고

그 다음날 술을 마시다가 키스를 했고...


타이머에 적힌 순서대로 따라가다 보니 타이머의 화면에는 [고백 D-3] 이 표시되었다. 평소의 일훈이라면 고백에 앞서 행동한 것들 – 손을 잡는 것, 키스하는 것 모두 한참은 더 뜸을 들일 일이었지만 망설임이 섞일 틈이 없었다. 타이머가 그 타이밍이 맞다고 하니까. 그 타이밍이 지나가고 나면 그녀 역시 지나가 버릴 수 있으니까.


실제로 타이머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때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면, 정말이지 성공적이라는 말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막상 ‘사귄다’는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일훈은 망설여졌다.

누군가 일훈에게 그녀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분명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드라마에서처럼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사랑할 용기 같은 것은 일훈에게 없었다. 애초에 사랑이란 무엇인가?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의 미묘한 차이는 막상 나의 일이 되면 더욱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고민은 깊어질수록 답을 찾기 어려운 법이다.

아무 결론도 내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려 타이머가 점지한 고백하는 날이 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와 영화를 보고 나와 어둑한 공원을 걷고 있었다.

고백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일훈은 그녀의 재잘거리는 이야기에도 집중하지 않은 채 타이머에 떠올라 있던 [고백 D-DAY] 문구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연인이 되었다.



“내가 이 여자를 정말 사랑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아.”


일훈은 정우가 일하는 바에 앉아 있었다. 그 후로도 몇 번 그 바를 찾아가 보았으나 일훈에게 타이머를 건네준 중년 신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불꽃이 파바박 튀겨서 이 사람이 안될 것 같은 연애는 거의 없어. 썸과 연애는 다른 차원의 문제지.”


반 년 정도 바텐더 일을 하더니 제법 그럴 듯 한 말을 해줄 수 있게 된 정우였다.


“나는 내 마음에 확신같은 것이 들어서 그녀와 사귄 게 아니야. 그 점이 상대에게 너무 미안해...”

“고백은 지가 해 놓고 무슨 소리? 누가 협박해서 사귀냐?”


순간 일훈은 타이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말을 삼켰다.

일훈에게 있어 정우의 이미지는, 소곤소곤 이야기한 것도 큰 소리로 여기저기 전달하는 확성기같은 느낌이었다.


“너가 먼저 좋다고 했잖아. 그리고 걔도 너가 좋다고 확인을 받았고. 그럼 그 시점에서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야. 이제 합의 하에 그 좋은 감정을 키워나가는 게 너희들이 할 일인 셈이지. 그런데 뭐, 연애라는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니 나도 뭐라고 확신은 못 하겠다.”


역시, 일단 해 보는 수밖에 없는 걸까.


이제는 제법 맛있어진 정우의 칵테일처럼, 연애란 것은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고 혼자라면 알 수 없는 맛의 세계를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타이머의 힘을 믿어보자고 다짐하는 일훈이었다.



5년이 지나갔다.


갈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관계. 타이머는 일훈이 조금이라도 소홀해지지 못하도록 끝없이 다음 이벤트 날짜를 띄워왔다. 100일, 1년 등 커플이라면 으레 챙겨야 하는 날짜를 까먹지 못하게 알람까지 울려주었고 분위기가 나빠질 때에는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 사과하기 D-1] 따위의 알람으로 두 사람이 떨어지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어 두었다.


가끔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타이머의 버튼을 눌러 보아도, 타이머는 다음 이벤트를 이야기할 뿐, 일훈이나 그녀의 세세한 심리상태까지는 알려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일훈의 연애는 결혼까지 무난하게 달려가는 듯했다.


“일훈 오빠?”


희연이었다.

홀로 거래처에 들렀다가 바로 퇴근하는 길이었다. 희연 역시 그렇다고 했다.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를 이야기하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동네 술집에 앉아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인지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빠 대화가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네. 예전에는 얘기하다가 갑자기 어색해지는 느낌 되게 많이 받았었는데.”

“내가 그랬어?”

“엄청, 역시 사람이 연애도 좀 하고 그래야 되는 건가 봐.”


그 사람이 너였으면 했다. 라고 순간 뱉을뻔 했다.


“그런데 결혼 하자고 이야기할 때,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러자고 했어?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아 이 사람이구나!’하고 꽂히는 순간이 있다고 하던데.”

“사실... 내가 결혼하고 싶어서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었어.”

“오~ 그럼 그분이 결혼하자고 먼저 프로포즈한거야? 완전 걸크러쉬네.”

“아니... 사실 기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 같아.”

“뭐야, 대화 잘 한다고 칭찬했더니 또 이상해지네.”


“연애 타이밍을 알려주는 기계가 있어... 그게 알려주는대로 고백하고 이벤트도 하고... 계속 시키는대로 따라가다보니 어느 새 그렇게 되었는데... 잘 모르겠어.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해서 결혼을 하는 걸까? 어쩌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말에 그렇게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술김에 나온 고백이었다. 희연은 이제 일훈과 별로 인연이 없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이 기계에 대해 이야기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제대로 듣지도 않을 것이었다.


“일훈오빠 되게 쓰레기였네.”

“맞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쓰레기같은데...”

“그런데 오빠가 고백을 하고 결혼 코앞까지 왔다는 건, 이러나 저러나 그분이 좋아서 그런 것 아니야? 만약 그 기계가 오빠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한테 그러라고 했어도 오빠가 그랬을까?”


과연 그랬다.


“결혼한 친구가 그러더라고. 더 이상 연애로 채워질 수 없는 뭔가가 삶을 권태롭게 만들고, 그게 달라질까 하는 기대감에 결혼을 선택하게 됐다고. 난 오빠가 이런 종류의 대답을 할 줄 알았거든.”


일훈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을 하려 하는 일훈이 쓰레기 같다고 표현한 것인지, 대화의 방향이 희연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쓰레기 같다고 표현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오빠 말대로 진짜 그런 기계가 있다면, 오늘 들어가서 오빠 마음을 다르게 먹고 보고 물어봐봐. 정말 그렇게 신기한 능력이 있다면... 어쩌면 오빠 마음에 따라서도 숫자가 달라질지 모르는 거잖아?”


희연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일훈은 책상 위의 타이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가?’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도록 만든 것이 희연이기 때문인지 자꾸만 희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희연을 떠올리며 버튼을 눌러봐야 5년전 그 시간에 멈춰있을 텐데... 그러면서도 일훈은, 끝내 희연을 떠올리며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첫키스 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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