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다른 술도 아니고 꼭 소주를 먹어야 한댜~”
편의점 카운터 앞에 선 노인은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주 오던 노인이었다. 꼭 다른 손님이 있을 때 어슬렁어슬렁 들어와서는 자신이 지금 술이 필요한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곤 했는데, 그 이유는 올 때마다 달라졌다.
당신의 아들께서 서울 5대 병원의 병원장인데, 아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자신의 힘든 처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단다. 그런데 오늘은 아들이 보고 싶으니 술을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처럼 누가 보아도 행색과 상황이 연결되지 않는 말을 늘어놓는 이 노인은, 술이 필요한 이유는 말하지만 술을 달라고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만은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듯이.
“맥주를 먹으면 머리가 아파서 안 된댜, 갸는 죽어도 소주를 마셔야 한다는구먼”
오늘은 자신의 옆집에 살고 있다는 다른 노인의 핑계를 대고 있었다.
큰 병원이 가깝고 재건축이나 재개발과는 거리가 먼 지역. 동네가 동네인지라 이런 류의 노인이 많았다. 사장님은 늘 여분의 술을 준비해두고 필요할 때 하나씩 쥐여 보내라고 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지난 시절의 광고 모델이 프린트되어있는 오래된 술이었다. 유통기한이 없는 것이 소주라지만 버리기도, 판매하기도 찝찝한 상품이었지만 공짜로 술을 받아가는 노인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노인들은 소주를 받아 들고 곱게 물러나지 않았다. 특히 지금 이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카운터 앞에 버티고 서서 이야기하는 대화 방식을 고집했다. 중간중간 듣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으면 노인의 목소리와 행동은 더욱 커졌다.
뭔가를 대비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리고 그 사건의 부산물은 오롯이 시간 단위로 돈을 계산해 받는 아르바이트생들의 몫이었다. 오래된 소주를 받아가는 노인들은 그 답례로 자신의 오래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르바이트생들에게는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소주가 아니라 잠자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라고,
일훈은 혼자 결론지었다.
혼자서 벽만 보고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는 일은 너무 외로우니 자신에게 뭐라고 할 수 없는 또 다른 사회적 약자에게 자신의 울분을 털어놓는 것이라고. 그것이 진실이고 아니고는 상관없었다. 아마 함께 소주를 먹어야 한다는 옆집의 노인도 없는 사람일지도, 집에는 마시지 않은 소주가 쌓여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외로워서 그래, 외로워서...”
외로움은 사람을 어떻게 비틀어 놓는가.
더 이야기하겠다는 것을 겨우 말리고 나서 비실비실 소주 한 병을 받아 들고나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일훈은 읊조렸다.
심야의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어째 방문하는 사람마다 각각의 고통을 주는 시간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놀라울 정도로 고요한 순간도 찾아오는, 그야말로 중간이 없는 일이다.
적막 속에서 멍하니 있던 일훈은 전날 받은 러브타이머를 꺼내보았다.
신기한 물건이지만 지금의 일훈에게는 사용할 일이 없는 기계였다. 이 기계가 30일만 더 빨리 일훈의 손에 들어왔다면 지금 일훈과 희연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훈은 휴대전화를 꺼내 희연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프로필 사진은 그새 또 다른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카페 데이트 사진 같은데... 하지만 희연이 카페에서 데이트를 하든, 스터디를 하든 일훈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으며, 러브타이머의 숫자는 지나간 날짜만큼 숫자가 늘어날 뿐이었다.
어쩌면 이 프로필 사진은 다른 사람이 있으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일지도 모른다.
그녀와의 대화 내용을 복기해보다가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른 일훈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희연과의 대화를 제외하면 이성과 개인적으로 연락한 대화방은 한참 동안을 내려가야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학기, 같이 모이기를 끝내 거절하다가 발표일에 잠수해버린 조별과제 사람.
교대 시간에만 잠깐 마주치는데 가끔씩 친한 척하며 대타를 요구하는 주간 아르바이트.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조별과제의 사람을 생각하며 버튼을 누르자
[생리적으로 무리]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너무하네...”
일훈은 조금 인상을 찌푸리고는 주간 아르바이트를 떠올리며 버튼을 눌러보았다.
[먼저 인사하기 D+72]
먼저 인사한 적도 없었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던 일훈은 정말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번 교대를 할 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쪽은 항상 그녀였다. 몇 번은 상대가 인사를 건네도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왜 그녀에게 그리도 차가운 사람이었나. 두 달 전쯤 먼저 인사를 건넸다면 이 편의점에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두 사람을 시작으로 일훈은 친구 목록에 있는 모든 이성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는데 100명쯤 되는 친구 목록 중 이성은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일훈이 알고 있는 유전학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생물학의 놀라운 오류를 발견하는 순간 이건만 일훈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버튼을 누르는 일이 더 급한 듯했다.
거의 모두가 이어질 수 없다는 종류의 멘트이거나 이미 한참 지나가버린 인연들이었다.
단 한 사람.
D 뒤에 마이너스가 붙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였다.
일훈의 기억 속에도 어렴풋하게 남은 후배였다.
언젠가 한 번 조별과제를 같이 한 것도 같은데 그게 어떤 과목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니 조별과제가 아니라 신입생 OT에서였던가. 시종일관 조용하던 친구였다. 의견을 물어보아도 어지간해서는 다 괜찮다고 대답하는 친구. 그 누구도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할 것만 같은 친구.
일훈은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사진이었지만, 본인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볼 수 있는 사진이었다. 그녀를 찍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또는 사물을 찍은 뒤 배경에 걸린 것을 잘라서 사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이 친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 친구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일훈은 기계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다시 한번 버튼을 눌러보았다.
[시간표 물어보기 D-2]
수강신청이 3일 남은 시점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