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타이머 (상)

타이밍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

by 곶사슴


“그냥 좋은 오빠 동생으로 있으면 안 될까?”


이번에도 혼자 헛물을 켜고 말았다.


“그런데, 고작 이런 일로 우리 모임 분위기 이상해지는 거 너무 싫어. 그냥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계속 모이면 안 될까?”


약속시간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억지로 연락해가면서 모임을 이어나갔던 것은 다 너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단 둘이 만나자고 하면 부담스러워 할 너를 위함이었다. 너가 없다면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그들의 비위를 맞출 이유가 없다.


‘고작 이런 일’이라니. 일훈은 그녀 생각에 며칠 밤을 제대로 잠들지 못했는데, 그녀의 거절로 일훈의 마음은 이미 걸레짝이 되어버린 기분인데. 어떻게 전과 같음을 이야기하는가.


일훈은 차마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고,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돌아서고 마는 것이었다.


아마 모임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모임을 계속 연다는 것은 일훈이 희연을 계속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들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팔방 날뛰던 일훈의 마음은 이제 철저하게 가두고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번에도 간만 보면서 질질 끌다가 다른 남자 생긴 거겠지.”


정우는 쉐이커를 흔들며 말했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 치고는 꽤 능숙해 보이는 손놀림이었다.


“아니야... 같이 여행도 갔던 사이가 어떻게 그렇게 돼.”


“여행을 가면 뭐,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런 상황에서 이미 게임 끝이지.”


“아니야... 분명 너무 빨리 가까워지는 거 싫다구...”


“하이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니까 고자 소리 듣는 거야.”


정우는 이름이 외워지지 않는 파란색 칵테일을 일훈에게 내밀고는 다른 손님 쪽으로 사라졌다. 속상한 마음을 친구에게 털어놓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까 평소에 가지 않던 바에 가서 비싼 술도 시켰건만, 막상 그 친구는 바쁘다는 이유로 일훈을 상대해주지도 않았다.


“친구라고 있는 것들도 이렇게 나한테 관심이 없는데 여자들은 오죽하겠어...”


일훈은 입을 삐죽이며 칵테일을 홀짝였다.


원래 이런 맛인 걸까.

이온 음료처럼 새콤달콤한 맛이 날 줄 알았는데 칵테일의 맛은 한없이 쓰기만 했다. 어쩌면 정우가 일훈에게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애에 달콤한 맛만 있는 것은 아니지.”


일훈의 옆쪽에 앉아있던 중년의 신사가, 세상 느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네?”


“들으려고 들은 것은 아니네만, 새로 온 바텐더가 통 이 쪽을 바라봐주지 않아서 말이지.”


“아... 제 친군데... 원래 남 얘기 같은 건 잘 못 들어주는 성격이에요. 바텐더 일은 얼마나 하게 될지... 혹시 마음 상하셨다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상냥한 친구로군, 보아하니 저 신입은 친구인 자네의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자네 이야기를 조금 들어도 괜찮을까?”


일훈은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약간의 경계심을 느꼈지만, 특별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그러기로 했다.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자네는, 그녀와의 관계를 발전시킬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군.”


“다들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타이밍 못 잡고 질질 끌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고 말이죠. 꼭 이번 일만 그런 게 아니라... 제 연애는 매번 그랬어요.”


“그것 참 신기한 일이군. 보통은 그런 일을 몇 번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타이밍이라는 것을 익히게 되는 법인데 말이지.”


“제 말이요. 고백도, 스킨십도, 키스도 친구들은 ‘이 때다!’ 하는 순간이 빡! 하고 느껴진다는데, 저는 아무리 그런 것을 느끼려고 해 봐도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아요. 어떨 때는 너무 빨리 가려고 하다가 망쳐버리기도 하고, 그런 것 계산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망치기도 했고요. 이번에 희연이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속상해서 목이 타는 건지, 아니면 술이 정말 맛있는 건지 일훈은 이미 같은 술을 세 잔 씩이나 비우고 있었다. 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계속 같은 술을 내 주었다. 여전히 썼지만. 한 번 들어가기 시작하니 멈출 수 없었다.


“자네, 인간이 왜 위대한지 알고 있나?”


“인간이요?”


이게 무슨 헛소린가. 일훈은 그저 희연을 추억하고 욕하면서 술에 취하고 싶었을 뿐인데 옆에 앉은 아저씨는 갑자기 인류학적인 이야기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사실 인간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생물일세, 발톱은 날카롭게 다듬어도 금방 깨져버리고, 이빨은 넓적해서 씹기에 좋지만 물기에 위협적이지 않다네. 피부는 또 어떻고, 어디 스치기만 해도 쉽게 피를 보이지.”


“어... 연애 상담을 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종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바로 도구를 쓴다는 점일세.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도구를 찾고, 없으면 만들기까지 하면서 자신들의 문명을 발달시켜왔다네.”


이쯤 되니 일훈은 더 이상 반박할 의지를 잃고 중년신사의 끝나지 않는 연설을 멍하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면서.


“왜 문명을 발전시킬까? 자신‘들’의 유전자를 발전시키기 위해서지. 하지만 복수형이 빠진 자신은? 인류는 그 안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네. 결혼과 연애 시장이, 그 대표적인 시장이지.


그리고 자네는, 안타깝지만 그 전장에서 남들보다 현저히 부족한 뭔가가 있는 셈이네.”


“저 놀리시려고 이런 말씀을 그렇게나 장황하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게. 인류가 다른 종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했듯, 자네의 개인적인 전쟁에도 도구가 필요하다는 뜻일세. 맨손으로 밀린다면 칼을 손에 쥐어야지.”


“참 멀리 돌아왔네요. 그런데 저는 돈 같은거 없어요. 지금도 원래대로라면 술집에서 친구들 불러서 진탕 부어도 모자란데, 돈이 없어서 친구 일하는 바에 와서 몇 잔 얻어먹고 있는 상황이라구요.”


“내가 말한 도구는 돈 얘기가 아닐세. 기다려보게나.”


중년의 신사는 서류가방에서 작은 타이머를 꺼냈다.


얼핏 보면 예전에 사라져버린 삐삐같이 생기기도 했다. 간단한 조작 버튼이 몇 개 달려있고, 화면은 칼라가 아니라 백라이트 조명이 켜지는 방식이었다. 대충 보아도 오래된 물건이었다.


“뭐예요, 그건. 그런 도구가 필요한 거예요?”


“이것 참, 못 말릴 정도로 참을성이 없는 친구로군. 이 도구는 그런 참을성 없는 자네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걸세.”


중년의 신사는 약간의 짜증을 내며 타이머의 전원을 켜고는 몇 가지를 조작해 일훈에게 건냈다.


“받아, 내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이지만 이 아저씨의 말상대를 해준 대가로 주는 걸세.”


엉겁결에 타이머를 받은 일훈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대상이 없습니다]


허망한 문구가 떠 있었다. 일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년의 신사를 바라보았다. 신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네가 어느 처자와 ‘무슨 관계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 이 기계를 꺼내게. 그리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여기 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은데.


지금 당장 중년 신사의 얼굴에 던져도 시원치 않을 상황이지만, 일훈은 괜스레 실험을 해 보고 싶었다. 정신 나간 듯한 행동도 누가 시키면 해볼 수 있는 것. 술이 가진 또 다른 매력이었다.


일훈은 희연을 잠시 생각한 뒤 버튼을 눌렀다.


[고백 D+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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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스도 아니고 플러스라니, 고백을 오늘이 아니라 30일 전에 했어야 한다는 이야기일까. 그러고 보니 한 달 전 쯤에는 희연에게 메시지를 보내도 빨리 빨리 답장이 돌아왔던 것 같기도 하고. 일훈은 신기해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맥주 포스터 속의 광고 모델을 보고는 그녀를 생각하며 다시 버튼을 눌러 보았다.


[인연이 없음]


연예인과 일훈이 무슨 인연이 있겠는가. 어쩌면 이 기계.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기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거지?


일훈은 놀란 마음에 고개를 들어 중년 신사에게 질문을 하려 했으나, 중년 신사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것이 무엇인지, 왜 나에게 이런 것을 주는지 물어볼 타이밍을 놓쳐버린 일훈은 멍한 눈으로 비어있는 잔들을 바라보며 타이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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