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확률 1%의 비행기, 리스크를 다시 배웠다.

by 김명규

#1. 수정할 수 없는 오류


불과 일주일 전, 나는 여의도 IFC 빌딩 10층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시스템 에어컨의 쾌적한 바람. 빳빳하게 다림질된 셔츠. 모니터 속 엑셀 화면.
당시 내 고민의 전부는 '실사 보고서의 오타'나 '오늘 점심 메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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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히말라야 산맥 4,000m 상공에서 덜덜거리는 19인승 경비행기에 갇혀 있다.

"쿠쿠쿠쿵-"

낡은 두 개의 모터는 금방이라도 멈출 듯 굉음을 냈고, 기체는 수시로 요동쳤다.
창밖으로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설산이 위협적인 속도로 지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앞 좌석 등받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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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은 직업병처럼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다.
'해외 폐기 직전 기체 수입. 산악 지형 변수. 연평균 추락 1.5회. 생존 확률 희박.'


서울 사무실에서 다루던 '리스크'는 고작해야 실사 보고서의 숫자 오류나 횡령 가능성 같은 것들이었다.
모니터 속 리스크는 Ctrl+Z를 누르거나, 빨간 펜으로 수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얇은 철판 하나에 의지해 허공에 떠 있는 이곳의 리스크는 '수정 불가능'했다.
엔진이 멈추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것은 숫자놀음이 아니라, 실존하는 죽음의 공포였다.




#2. 효율성이 거세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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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간신히 흙바닥 활주로에 바퀴를 내렸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 대신 헛구역질을 삼켰다.

하지만 진짜 고행은 그때부터였다.

도로가 끊겼다. 바퀴 달린 모든 문명이 거기서 멈췄다.

첫 목적지까지 꼬박 3일을 걸어야 했고, 전체 일정을 소화하려면 두 달 가까이 산길을 타야 했다.

내 앞에 선 셰르파*들의 등에는 내 키만 한 짐 보따리가 얹혀 있었다.

쌀, 텐트, 발전기, 그리고 우리가 마실 생수까지. 무게는 족히 30~40kg.

"이걸 다 지고 간다고요?"

가이드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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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의식 중에 그들의 일당과 짐 무게, 이동 시간을 머릿속으로 나누고 있었다.

'운송 효율 최악. ROI 산출 불가.'


서울에서는 클릭 한 번이면 당일 배송되던 물 한 병이,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무릎 연골을 갈아 넣어야만 옮겨질 수 있는 자원이었다.


*셰르파 : 히말라야 산맥에서 등산대의 짐을 나르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네팔 부족을 의미함




#3. 짐짝이 된 구원자


산행은 가혹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런데 내 앞의 셰르파들은 거친 호흡조차 내뱉지 않았다.
슬리퍼나 다 닳은 운동화를 신고도, 최신 등산화와 기능성 의류로 무장한 나보다 훨씬 빨랐다.


나는 이곳에 '도움을 주러' 왔다고 생각했다.

소득증대 프로젝트. 가난한 이들의 삶을 개선한다는 거창한 명분.

하지만 산길 하나 제대로 걷지 못해, 그들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는 짐짝은 바로 나였다.


서울에서 작성했던 화려한 보고서와 예산안은
이 흙먼지 날리는 산길 위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나는 구원자가 아니었다.
값비싼 고어텍스 점퍼를 입은, 체력 약한 이방인이었다.




#4. 숫자로 기록되지 않는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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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아늑한 산장에서 불을 쬐며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라디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네팔 직원들의 동작이 멈췄다.


한 유력 정치인이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
경로는 우리가 왔던 그 길. 기종도 같았다. 전원 사망.

식탁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주일 전, 내가 느꼈던 기체의 그 불길한 떨림은
과민반응이 아니라, 죽음이 스치고 간 진동이었다.


순간, 서울 사무실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최고급 가죽 의자에 몸을 파묻은 임원들. 일정한 온도의 회의실.
그 안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리스크 헷지'를 논하던 목소리들.

그때 우리가 논하던 리스크는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나.


진짜 삶의 리스크는 엑셀 파일 안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낡은 경비행기의 엔진 소리 속에,
셰르파의 땀방울 속에,
예측할 수 없는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곳의 공기 속에 있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나는 펴놓았던 수첩을 덮었다.

오늘은 아무런 숫자도 적을 수 없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