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워홀 첫날

가죽의 가치 (1)

by 나호란

얼굴을 감싼 따스한 햇살에 절로 눈이 떠졌다.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좁은 기숙사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어젯밤 55시간 비행 후 도착한 방에 짐도 풀지 않은 채 나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어제 벗어 던진 운동화에 대충 발을 쑤셔 놓고 일어서며 기지개를 켰다. 뻣뻣한 근육들은 풀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나는 무채색 커튼을 치고 창문 앞에 섰다. 스타카토의 앙증맞은 새소리 외에 고요한 정적이 사방을 에워쌌다. 창밖 잔디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30명도 너끈히 들어갈 수 있는 넓은 수영장이 눈에 들어왔다.


창을 등지며 어젯밤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쳐 둔 이민 가방을 풀었다. 문득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한 게 생각나 시간부터 확인했다. 6:45. 다행히 늦잠 자지 않았다. 호주에서의 첫 근무일에 지각하면 큰일이다.


식당에서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기숙사 앞에서 제이슨을 기다렸다. 제이슨은 어젯밤 공항에서 나를 픽업한 농장 관리인이다. 다윈 국제공항 입국장 앞에 제이슨은 영어로 ‘신민재’라고 성의 없게 갈겨 쓴 종이를 들고 있었다. 제주도도 가보지 못한 내가 다윈에 오기 위해 4개 국제공항을 거쳐야 했다.


인천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 내 바로 앞에 앉은 8살 정도 보이는 꼬마가 생각났다. ‘땅이 움직여!’ ‘와! 구름이 점점 커져!’ 이륙하기 전부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던 그 꼬마는 나의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어른의 체면 때문에 맞장구를 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지만 그 꼬마의 첫 비행을 함께 나눌 수 있어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이륙할 때 호주 가기 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결코 같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반갑다. 난 구도현.”


저음의 목소리가 회상을 뚫고 생각의 파편들을 흩트려놓았다. 돌아보니 뜨거운 호주 태양에 구워진 것 같은 까만 피부의 도현이 나를 보며 웃었다.


“오늘 안내는 내가 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신민재라고 합니다.”

“몇 살?”

“스물하나입니다.”

“내가 형이니까 말 놓는다.”


선임이 한국인이라 반가웠다. 이 농장에 워킹홀리데이로 오는 청년들이 대부분 아시아인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어설픈 영어로 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돼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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