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본질인가, 비유인가

by 노정

구반문촉(扣槃捫燭)은 쟁반을 두드려 소리를 듣고, 촛대를 만져보며 해에 대해 짐작한다는 뜻을 가진 성어이다. 이 성어처럼 우리는 가끔 쟁반 소리만 듣고, 혹은 촛대만 만져보고서 그것이 해의 전부라고 믿었던 적은 없을까요?


내가 가진 단편적인 경험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고 확신하며, 정작 중요한 본질은 놓치고 살았던 순간들 말입니다.


송대(宋代) 소식(蘇軾)의 <일유(日喩)>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눈이 밝은 사람에게 해에 대해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의 모양은 구리 쟁반과 같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쟁반을 두드려 그 소리를 기억해 두었다가, 훗날 종소리를 듣고 그것을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해의 빛은 촛불과 같다고 하자, 그는 촛대를 만져 그 모양을 익혀 두었다가 훗날 피리를 만져보고는 그것을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와 종, 그리고 피리는 서로 아주 거리가 먼 것인데 말입니다. (生而眇者不識日, 問之有目者. 或告之曰, 日之狀如銅槃. 扣槃而得其聲, 他日聞鐘, 以爲日也. 或告之曰, 日之光如燭. 捫燭而得其形. 他日揣籥以爲日也. 日之與鐘籥亦遠矣.)


위 내용의 핵심 의미는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오류와 한계입니다. 장님이 해의 본질인 빛과 열기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타인이 빌려온 비유인 쟁반(소리)과 촛대(촉각)라는 정보에만 매몰된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는 단순히 시각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관념이나 편협한 지식에 갇혀 사물의 전체상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즉, 사물을 가리키는 비유만 보고 그 본질은 보지 못하는 격입니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단편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어버리는 확증편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쟁반을 두드려 소리를 듣고 촛대를 만져보며 해를 짐작한다는 뜻을 가진 구반문촉(扣槃捫燭)이라는 성어는,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단편적인 정보나 겉모습만 가지고 제멋대로 추측하거나 오해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구반문촉과 같은 사례는 현대 사회에서도 흔히 발견됩니다. 누군가의 단점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판단하거나, 인터넷상의 검증되지 않은 단편적인 정보만을 바탕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또한 전문가의 비유 섞인 조언을 본질 파악 없이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 엉뚱한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는 소통의 오류 역시 구반문촉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지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엄중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파편화된 정보를 절대적인 진리로 믿는 오만은 결국 그릇된 판단으로 이어집니다.


둘째, 본질을 꿰뚫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나 타인의 설명에만 의존하기보다, 그 이면에 숨겨진 진짜 가치와 원리를 스스로 사유하고 탐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셋째,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가르치는 이는 상대가 오해하지 않도록 본질에 가까운 설명을 해야 하며, 배우는 이는 비유에 사로잡히지 않고 전체적인 맥락을 읽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따라서 구반문촉은 우리가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사물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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