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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Jun 17. 2018

나는 왜 베이징에 왔나

동아시아 노동자계급 국제연대라는 몽상

이 글은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소식지 《품》 35호에 기고한 글이다. 일기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써달라고 하셨는데, 그리 편안하진 못 했다. 중국에선 평소 글을 잘 쓰지 않기도 하고, 떠나온 후 한국에서벌어진 수많은 일들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름의 의무감을 갖고 소식을 계속 전하려 한다.



베이징에 온지도 어느덧 3개월이 되어간다. 한국에서 나는 활동가로 살았다. 활동비조로 최저임금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살았지만 사회운동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고 사랑하는 일이었다. 좌충우돌했던 학생운동,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화예술운동, 정치조직에서의 상근 활동과 사회운동 월간지 편집, 그리고 최근 뉴스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서의 노조 상근 활동까지 힘들고 숨 가픈 나날이 끊이지 않았지만 젊은 세대 활동가로서는 남부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모든 슬픔과 이별, 고통과 분노, 타인을 힘들게 했던 기억 혹은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은 기억 모두가 나를 닳게 하고, 강하게 했다. 어쩌면 강해졌다는 건 착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감정에 무뎌져 쉽게 기뻐하거나 쉽게 지치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나를 소모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인 건 내게 ‘전망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사진 김모두

전망의 부재는 어느 운동에 위치해 있건 활동가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는 질문이다. (왜 그럴까? 아무리 마음을 갈고 닦아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희생과 자신이 포기한 것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작은 전망들이 있었지만, 아무리 고민하고 공부해도 나를 계속 두근거리게 하는 큰 전망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선배들이나 또래 활동가들을 보면 자신에게 절망하거나 운동으로부터 냉소를 느끼고 운동을 떠나거나, 우울증을 얻거나, 아니면 끈기 있게 삶을 살아간다. 나 역시 절망과 냉소를 느낀 적이 많았지만, 그러기엔 지난 삶이 너무 아쉽고, 미래의 내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흐릿한 현실을 인내심 있게 견디며 살기엔 참을성이 너무 부족했다. 난 작은 것을 소중히 다룰 줄 아는 좋은 심성도 갖지 못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난 유별난 결의를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 그게 뭐였는지는 나중에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머무를 수 없는 도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베이징은 정말 거대한 도시다. 면적만 해도 16,808㎢인데 이는 605.21㎢인 서울의 약 28배, 16,873.51㎢인 강원도와 비슷한 크기다. 그 때문에 베이징시 지도를 보며 보통의 대도시와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3개월 전 나는 이 거대한 도시의 한복판에 왔다. 내가 사는 곳은 어느 정도 도심에 가까운 곳인데, 미로처럼 얽힌 지하철을 45분 정도 타면 도시의 정중앙에 있는 자금성에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있다.

건물 창밖으로 내다본 베이징 / 사진 김모두

베이징은 자금성에서 시작하는 순환로와 동서남북으로 구분되는데 2환에서 시작해 6환까지 확대된다. (1환은 자금성 주변도로이고, 베이징을 둘러싼 허베이성에 7환 고속도로가 있긴 하다.) 사무실 빌딩이나 아파트가 2환에 가까울수록 비싸고 5환 밖으로 넘어서면 아주 조용한 농촌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2환 아파트는 평수가 작아도 한국돈 30억 원에 달한다. 4환만 해도 우리 기준 15평 아파트 매매가가 5억 원이라고 하니 할 말을 잃게 한다. 베이징 4환 안에 집이 있는 사람이면 중국에선 무조건 중산층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4환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곳에 있는 한 건물 9층에 창문도 없는 3평짜리 방에 산다. 건물을 나서면 조용한 거리가 나오는데, 아마 이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그 거리에 산다. 열쇠공 할아버지, 인도 위에 세워두기만 하고 폐지 창고로 활용되고 있는 트럭엔 젊은 부부가, 그 옆의 빨간색 차 안에는 세살쯤 되는 아이와 부모가 함께 산다. 이 차는 아주 작은 경차인데 움직이는 걸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한데 이 작은 차 안에 세 가족이 산다. 아무리 집이라도 살기가 어려우니 이런 집시와 같은 삶을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다.

사진 김모두

도시의 숨겨진 공간, 혹은 5환 너머 베이징 변두리 외곽의 집단거주지에 사는 사람들을 ‘농민공’이라 부른다. 농민공은 농촌 출신 도시 이주노동자를 일컫는데, 중국은 주소 이전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올라온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해 임금이 극히 적고 노동 조건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거주도 불완전하고 이에 따른 자녀 교육 문제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허베이성이나 산시성, 동북3성 등 전국 각지의 농촌에서 온 이들은 베이징이나 상하이를 포함해 적게는 수백만, 많게는 2천만에 달하는 대도시에서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전국적으로 2억 9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의 활동가들은 농민공을 ‘신노동자(新工人)’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고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 잠시 도시에 와 일하다가 다시 귀향했지만, 개혁개방과 세대를 거쳐 도시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신노동자들은 부모 세대와 달리 대도시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하지만, 도시 생활의 절망도 동시에 느끼고 있다. “머무를 수 없는 도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란 말은 이들의 이런 딜레마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이 문제를 알고 있으면 이들은 베이징에서 너무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관심이 없다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유령일 따름이다. 나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에 왔다.

연안지역 신노동자 운동

물론 최근 이들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킨 건 베이징이 아니라 광둥성과 푸젠성 등 연안지역에서다. 2005년 광둥성 포산시와 선전시 등 일대 공업도시에서 일어난 일련의 파업들은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출현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2005년 혼다자동차 포산공장 파업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곳에서 일하던 신노동자들은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은 공회(노동조합)가 자신들의 조직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는 무관심하다고 여겼다. 이들은 어떤 쟁의 조정 절차도 없이 갑자기 공장을 멈추었고, 공장 바깥으로 뛰어나와 시위를 시작했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파업들은 대개 이런 식이다. 쌓아온 분노가 폭발해 공장을 멈추고 공장 밖 혹은 마당으로 모여 요구를 표출한다.

사진 김모두

노동자들의 연이은 자살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폭스콘 공장 노동자들의 현실은 이런 분노를 자아낸 현실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폭스콘은 아이폰을 만드는 대만 국적 하청업체로, 공장을 중국에 두고 있었다. 이들은 젊은 노동자들을 공장에 가두다시피 하고, 하루 16~17시간씩 일을 시켰다. 노동자들은 빛을 보기도 어렵고, 잠시라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빡센 노동강도를 감당하며 일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게 바로 우리가 쓰는 아이폰이다. 한데 이 노동자들이 연쇄 자살로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살이 이어지자 공장 측은 노동강도를 감축시키기는커녕 공장 바깥의 허공에 그물을 설치에 노동자들의 자살을 막으려 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어쨌든 중국 남부의 신노동자 운동은 크고 작은 사건과 투쟁이 연이어 터지며 성장했고, 이후 농민공 조직화와 독립성 확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것이 쉬웠을 리 없다. 상당수의 활동가들이 구속됐고, 운동 역시 위축됐다. 다른 한편 농민공들의 요구들이 수용되기도 했고, 중국 경제에 큰 변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러 공장들이 인건비가 오른 연안을 피해 베트남이나 남아시아, 혹은 중국 서부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이후 도시에 남겨진 수많은 신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삶을 회복하느냐가 중국 사회, 아니 세계 자본주의를 뒤흔드는 변수가 될 것임은 확실하다.

베이징 노동자의집을 찾다

베이징엔 어떤 사회운동, 신노동자를 위한 어떤 운동이 있을까. 5환 바깥 피촌에 있는 베이징노동자의집이 대표적인 실천 중 하나다. 말이 ‘베이징노동자의집’(北京打工之家; 이하 ‘노동자의집’)이지, 피촌의 풍경은 농촌에 가깝다. 넓은 들판 위에 집단 거주구역이 있고, 그곳에 모여 사는 2만여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게 바로 노동자의집이다. 작은 피촌 거주구역 안의 시장 거리는 항상 북적거린다.


989번 버스처럼 베이징 외곽으로 향하는 버스가 점차 도심에서 벗어나면 버스 안은 농촌 출신 노동자들로 가득해진다. 이들은 낮에는 도심이나 주변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수천에서 수만 명 규모의 거주구역 내 작은 셋방에서 잠을 잔다.

사진 김모두

처음 피촌을 가는 길의 풍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버스를 한참 타고 가다보면 어느 순간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전쟁 직후의 풍경을 방불케 하는 드넓은 폐허가 나타난다. 지난해 말 있었던 베이징 화재 사건과 시정부에 의한 퇴거 조치들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시홍먼을 비롯해 펑타이, 하이뎬 등 베이징 내 135개 지역에서 벌어진 이 퇴거 조치는 수십만 명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는 보도가 있을 정도로 대대적이었다. 최대 10만 명이 강제 퇴거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나로선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어디로 떠났을까? 고향으로 갔을까, 아니면 다른 마을로 갔을까?


피촌은 그나마 비교적 깨끗하고 화재 위험이 없다고 판단됐던 모양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생각보다 깨끗하고 넓은 거주구역이 나타났다. 커다란 아치 입구를 지나 피촌으로 들어가면 사막의 오아시스가 나타나듯 갑자기 활기찬 시장거리가 펼쳐진다. 우리나라 읍‧면사무소 소재지와 비슷한 풍경인데, 여기에 옷가게와 슈퍼 등 모든 생활필수품이 모여 있다.


확실히 피촌은 신노동자의 마을이다. 현재 피촌 거주자는 2만여 명인데, 이중 이곳에 등록되지 않은 외지인이 1만 8천명에 달한다고 한다. (실제 등록된 인구는 2천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대부분 ‘꽁위(公寓)’라는 이름이 무색한 허름한 복층 건물에 사는데, 이곳 주민들은 건물마다 있는 공동 화장실을 쓰며 건물 안엔 한국의 여인숙과 닮은 작은 방들이 빼곡하다. 시장 물가는 대체로 저렴한데 이곳에서 찾은 한 산시(山西)국수집의 우육탕은 도심에서 먹은 어떤 국수보다 맛있고 깔끔하면서도 가격은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피촌 노동자의집 극장에서 열린 노동절 저녁문화제에 참석해 공연을 보고 있는 꼬마 아이 / 사진 김모두

노동자의집은 바로 이 피촌에 있는 노동자 문화공간이다. 노동자의집 위챗(微信) 계정 소개에 따르면 2009년 10월 공회를 설립해 공간을 일구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다양한 교육‧문화 사업으로 확대하고 있다. 피촌이라는 2만 명 규모의 농민공 마을이 활동 영역이지만, 이들의 유명세는 전국적이다. 노래 운동부터 시작해 신노동자 지원, 학습 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나 《전태일 평전》 같은 책을 읽으며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공부했고, 다양한 경로로 한국의 소식을 접한 바 있다. 한국 운동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한국 활동가들의 고민을 듣고 싶어 한다. 반대로 한국에 이들의 운동을 소개함으로써 미래의 양국 노동자운동에 더 많은 가능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음에는 이곳 피촌과 노동자의집 활동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볼까 한다.


나는 항상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세계로의 여정을 꿈꿔왔다. 두렵기도 하지만 내가 택한 이 방법이 한국의 사회운동, 나아가 동아시아와 세계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다시 세우는데 작은 보탬이 되길 희망한다. 좋은 뜻을 품은 많은 사람들이 아카데미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공부를 심화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다면, 나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지언정 한국 민중운동이 허락한 유학을 왔다고 스스로 간주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또 전하며 내 나름의 공부를 하려 한다. 보잘 것 없는 결과만 남길지라도 최선을 다 해 내 삶을 살아간다면, 작은 가능성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인지는 지금의 내 삶에 달려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모든 것이 모험이다.

사진 김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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