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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Jun 09. 2017

이병한의 《반전의 시대》 서평

이른바 '전환의 시대'에 무엇이 필요한가

얼마 전 레드북스에 갔다가 이병한의 <반전의 시대 – 세계사의 전환과 중화세계의 귀환>를 덜컥 사버렸다. 저자에 대한 관심보단 문제설정 자체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저자가 프레시안에 연재 기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이 책은 독자들과 일군의 지식인들에게 ‘니들은 왜 이걸 모르니?’라고 반복해서 꾸짖는 것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저자는 세계 인식의 패러다임과 가치 기준의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인용하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지난 30년 반동의 세월을 돌아볼 때, 왼쪽 날개를 다시 부러지고 우경화가 극심하다고 진단하고, “좌우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것만으로는 ‘역사의 반복’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반동도, 반복도 아닌 ‘반전’을 궁리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소 투박한 논리다.


저자는 오늘날 세계의 판도가 중국과 인도,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크게 뒤바뀌고 있음을 확언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역시 혁명의 실패와 자본주의로의 굴절이라고 평가하기보다 세계체제를 개조하고 근대가 뒤집히는(?) 사건이라고 평한다. 동아시아에선 중-일의 반전이 일어나고, 문명적 차원에서는 동-서의 반전이 이뤄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반전시대의 논리가 긴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진단을 바탕으로 저자는 중국의 ‘천하’와 ‘조화세계’ 개념을 가져와 국가 간 체계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제언한다. 그가 보기에 동아시아의 국가 간 체계란 겹겹의 중화질서가 물결처럼 포개진 ‘프랙탈(fractal)’ 구조였다. 안과 밖을 나누지 않는 이 자기반복적이며 복합계의 구조가 이른바 ‘천하질서’의 원리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유나 평등, 민주 등에 새겨진 근대적 의미를 죄다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책에서 그것을 가늠할 순 없다. 심지어 더 나아가더라도 거대한 난제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 근거해 저자는 근대적 세계관과 국제관계가 단순하며 획일적이라고 규정한다. 저자가 보기에 그것은 서구적 이데올로기에서 근원하며, 위기에 직면한 자본주의 체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가 할 일은 이런 비판을 기준으로 삼아 아시아 전역의 국제관계와 정치적 모순들, 갈등들과 결함들에 대해 다루는 일이다. 홍콩의 일국양제, 대만의 양안 관계에 대한 고민과 논쟁, 오키나와(류쿠)와 본토 사이의 관계를 ‘조화세계’의 차원에서 재설정하는 것, 티베트의 연기와 네트워크, 신장 자치구에서 전개되는 ‘조화사회’의 상, 광둥 모델, 인도차이나와 베트남, 아세안,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 등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 ‘중화세계’라 폭넓게 정의된 국가들의 난제를 다룬다. 헌데 내게 이런 정세 판단들은 어떤 측면은 지나치게 무비판적이고. 어떤 측면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 느껴진다. 저자가 시야를 넙게 키우려는 점 하나는 높이 사고 싶지만, 되려 "선생님은 왜 그렇게 밖에 못 보세요?"라고 되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또, 과도한 문제설정 때문인지 ‘민주’의 문제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대중이데올로기와 계급투쟁들에 대해서도 의도치 않게 무시한다. 이런 점이 그가 말하는 ‘조화사회’의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작동될 수 있는 측면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2부 ‘덕치’에서 저자는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른바 ‘동양적 전제주의’에 대한 서구적 시선에 대해 반박한다. 나아가 동방에도 천년을 내려온 ‘민주’가 있고, 그것이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고 말한다. 서구의 자유주의는 여러모로 ‘덕치’와 거리가 멀고 오히려 ‘덕’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쪽에 가깝다. 갈등과 분쟁은 법정에서 해결하고, 정치적 결정은 다수결의 합리성에 맡기는 식이란 것이다. 반면 공화주의에 대해선, “과연 모든 시민들이 유덕자가 될 수 있는가?”에 의문을 던진다. 따라서 그에겐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는’ 덕치의 원리가 ‘동방형 민주정치’(유교적 현실주의)의 논리가 된다.
그 때문에 저자는 유교로의 회귀, 중국공산당의 유교 학습의 의미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견해를 표출한다. 하지만 이런 입장에 있어서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고, 논거가 대체로 엄밀하지 않다. 주장만 있을 뿐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또 경제위기 상황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배제되어 있고, 동시에 중국의 일대일로나 인도 경제의 부흥, 이슬람권의 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점이 결정적으로 문제다. 경제성장률은 6.5퍼센트 정도 수준에서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 원자재 가격 상승과 부동산 시장 과열, 도시 실업률과 대학 졸업자의 취업난 등 산적한 난제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많은 우려가 표명되는 상황에서 저자의 분석은 과도한 낙관으로 점철돼 있다.


때문에 이런 진단은 이후 세계가 중국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중국 헤게모니’가 이뤄질 것이란 결론으로 이어지는데, 과연 그것이 민중에 대한 착취로 점철된 20세기와 확연하게 단절된 사회일지 확증하기 어렵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일언반구 없다. 이를테면 중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임금 농민공들에 대한 착취와 그에 맞선 저항들에 대해, 동남아시아와 인도, 인도네시아 등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공백은 정세 분석의 오류를 낳고, 나아가 계급투쟁에 대한 배제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덧붙여 시진핑 체제에 대한 그의 낙관도 쉬이 동의가 안 된다. 아무리 그가 중국 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고, 나름대로 강력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평가하더라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최근 노동자운동 활동가들에 대한 심각한 탄압에 대해 과연 ‘덕치’라는 평가를 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그 주장들이 꽤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시야를 넓게 보여주고, 나아가 근대 국가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에 도전한다. 국가 간 체계를 통시적이고 복합적으로 봐야한다는 주장 역시 귀 기울일만 하다.


저자가 보기에 진보진영 내의 중국 담론(창비의 동아시아론 등)은 주류 담론과 별 차별성이 없다. (서구적) 민주주의 결여를 비판하고, 대국주의 동향을 우려하며, 그로 인해 보수 담론 강화에 일조하고 한미동맹 체제를 고수하는 보수세력의 전략에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김희교의 진보진영 내 중국 담론 비판을 거들며, 지식인 간의 교류에 그치는 ‘실천의 과소’를 지적한다. 결론이 애매하긴 하지만 이는 꽤 귀 기울일만한 언급이다.


실제 동아시아를 둘러싼 복합적인 모순들은 기존의 국제관계를 초월한 국가 간 체계, 민간 교류, 담론장에서 지식인들의 논쟁과 교통,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 등 아래 위에서 활발하게 이뤄진다면, 동아시아를 둘러싼 무기 증강 경쟁, 민족주의적 대결 구도와 배타성, 국제연대의 장벽을 해소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교류와 운동들이 ‘민주’의 기본 원리가 되어야,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새로운 체계를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저자가 이런 시각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고 불필요하게 ‘중화 개념’의 재해석과 의미 확장에 몰두하고 있긴 하지만, 진정으로 노동자 국제주의적 실천의 장을 열려면 지난 시기 보수적/진보적 ‘동아시아 담론들’에 대한 탐색과 비판만이 아니라, 그것이 100년 전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사회운동 스스로 인식 틀의 확장을 도모해나가는 모험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다. 그래야 변혁의 전망과 노동자계급 국제연대의 새로운 장이 진정으로 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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