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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Oct 08. 2018

중국 좌파가 한국 노동운동을 소개하는 방식

[격류망] 80년대 한국은 어떻게 해서 노동운동의 고조를 맞이했을까?

슬럼프 극복을 위해 잠시 공부와 알바를 멈추고 딴짓을 했다. 아래 글은 중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좌파적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격류망에 어제 게시된 글이다. 짧은 글이지만, 중국 좌파 활동가들이 한국 노동운동을 보는 시각 중 하나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격류망은 마오좌파에 가까워 보이고, 구좌파에 가까워보인다. 모든 글을 읽진 않지만 현재 중국 사회의 다양한 현실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농민공"의 상황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하는 것, 자본주의 비판에 집중한다. 다른 좌파도 있지만 보통 전태일이나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소개에 있어서는 다른 매체들도 아래 논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중국은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 가깝다. 하지만 좌파들 역시 여전히 곳곳에 존재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며, 곳곳에서 다양한 실천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식하고 일종의 국제연대를 위한 지도를 그리고 교통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아래 글을 통해 생각해 볼 점은 이들 신/구 좌파들이 80년대 한국 노동운동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소개함으로써 하고자 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무엇인가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아래 글의 목적의식적 입장은 결코 최근 젊은 활동가가 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신노동자(농민공)와의 연대를 시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편집인의 허락을 얻어 브런치에 올린다.

글 : 루즈니우 (이는 필자 본명이 아닌 필명. 직역하면 ‘어린이를 위한 소’이지만, 성어로 ‘민중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을 뜻함.)

출처 : 격류망 (격류망은 중국의 좌파 성향 미디어 매체로 웨이신 계정을 통해 매일 논평을 발표하고, 서평, 정세에 대한 입장을 제출하고 있음. 지류왕은 짧은 소개를 통해 “청년공동의 플랫폼을 통해, 사회 문제에 대해 사고하고, 중국과 세계를 개조하길 희망한다.”고 밝히고 있다.)



80년대까지 한국의 노동운동은, 특히 1987년 봄에, 장관을 이루는 고조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고조는 결코 갑작스레 폭발한 것이 아니었으며, 노동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친 준비하고, 하나하나의 투쟁들을 겪어 차근차근 모색해낸 길이었다. 만약 그 전에 십여 년에 걸친 탐색?축적?반성이 없었다면, 최종적으로 형성한 고도의 단결 의식과 투쟁력, 노동자들이 이처럼 거대한 수로 갑자기 응집해서 자본가들에 대한 대규모의 격렬한 저항을 할 순 없었을 것이다.
70년대 초,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지극히 열악했다. 물질적 조건에서 엉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금 역시 매우 낮았고,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했다; 정신적인 압박 역시 사람들이 눈 뜨고는 차마 못 볼 정도였는데,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언어폭력과 모욕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은 기업의 관리자들에게 ‘한’을 품게 됐다. 하지만, 비록 이처럼 많은 ‘한’이 있었지만, 그때의 노동자계급이 반드시 고도의 집중을 형성하거나 조직적인 집단을 이뤄 이러한 불공평한 대우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모든 노동자계급에게 충격을 주었고, 노동자계급 의식이 각성하는 지표가 됐다.


70년대 초 내내, 노동자의 투쟁은 여전히 매우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성숙한 투쟁은 바로 밑바탕을 만들기도 한다. 노동자들은 점차 깨달아 보다 체계적인 집중의 노력을 통해 자기 운명의 중요성을 변화시켜갔다. 그것은 곧 ‘독립공회’(이하 ‘민주노조’로 번역하고자 함.)의 건설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70년대,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쟁취 투쟁은 경공업에서 주요하게 발생했으며, 이는 게다가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박약했던 탓에 그녀들은 부득불 인도주의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교회를 찾아 도움을 구했다. 그녀들의 목표는 매우 간단했는데, 곧 민주노조의 건설을 통해서 스스로를 위해 “사람답게 살고 싶다”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회의 정신과도 다르지 않은데, 그래서 교회는 그녀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에 매우 동의했다.


당시 사회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극심한 성차별적 편견이 있었는데, 그녀들을 지나치게 나약하며 타협하기 쉬우며 투쟁성을 갖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증명했듯이, 70년대 노동운동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이중의 압박(계급 억압과 성별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남성 노동자들이 표출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저항 정신과 결의, 단결과 복원력을 갖고 있었다.



사측과 공권력의 무력 압제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은 공장 내에서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을 대상으로 그들의 동정 여론과 지지를 얻기 위해 대량 선전도 했다. 비록 어떤 공장의 투쟁은 실패로 끝나 여성노동자들은 해고를 강요당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교훈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힘이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줬으며, 그렇게 쫓겨난 여성 노동자들은 지하 활동으로 전환하게 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의 지하 연결망의 발전에 기여하게 됐다.


하지만, 오직 노동자의 노력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레닌이 지적했듯이 노동자운동이 만약 사회주의운동과 함께 서로 결합되지 않는다면, 조합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사회주의 의식은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되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과학이론을 갖춘 지식인과 노동자가 결합되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의 정치적 의식을 일깨울 수 있고,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더욱 잘 밀고 나갈 수 있다.


전태일 분식의 비극은 노동자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식계 전반도 일깨웠다. 교회의 인도주의적 원조는 지나치게 온화하고 피동적이었기 때문에, 이미 노동자운동의 발전에 어울리지 않았다.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역사의 무대 위에 올라, 날마다 장대해지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동맹자가 되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80년대에 쉴 새 없이 각성하여, 공장 노동자로 진입해 노동자계급 해방의 사업에 뛰어들었다.



공장 안에서는, 학생들이 두 가지 종류의 전술을 탐색해냈다: 하나는 하나의 기업을 근거로 삼아 독립된 노동소조를 세우고, 학습을 거쳐 정치와 법률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노동자계급의 계급 의식을 제고하며, 선진적인 노동자와 노동자 활동가를 양성함으로써, 미래에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 다른 하나는 다만 산업 영역이나 지역 범위를 근거로 보다 광범위한 노동자 정치조직을 건설하고, 이로 인해 ‘노동자 대중의 폭발적인 역량’을 격발시키고,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집중적인 노동자 투쟁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두 가지는 큰 차이점이 많은 것은 아니었고, 단지 활동 범위에 있어서 장소가 다를 뿐이었으며, 기본 방향은 올바른 것이었다.


볼 수 있듯이, 학생과 지식인이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자들과 직접 결합했던 것은 ‘폭발성’있는 역량을 만들어냈다. 70년대 노동자의 자생적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80년대 대학생들의 참여 역시 노동자의 투쟁을 보다 성숙하고 단결력 있으며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노동자운동의 고조를 위해 견고한 기초를 제공했다.


그밖에도, 외부의 유리한 요소 역시도 운동의 고조시키는 촉매제였다.


70년대 한국은 박정희의 독재시기에 놓여 있었는데, 국내의 정치 환경은 꽤 고압적이고 전제적이어서, 공장 안의 노동자들조차 군사화된 관리를 받고 있었다.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된 후, 한국의 정치 환경은 다소 풀리게 됨으로써, 한국 사회의 계급 모순을 더 격화시켰다.



1987년이 됐을 때, 올림픽 경기를 치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대통령 임기를 연장시키는 것에 더 많은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전두환은 정치 자유화 정책을 실행하게 된다. 이것은 곧 노동자들이 분노의 물길을 트는 출구가 됐고, 1987년 노동자운동의 고조를 촉진시켰다.


한국 노동자 역사의 돌아보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노동자와 대학생 공동의, 오랜 조직 사업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노동자운동을 고조시키는 기초가 다져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번 노동자의 한 번의 작은 범위의 투쟁에 좁혀 작게 보지 말고, 실제로 실현시킨 양의 축적을 디딤돌 삼아야, 그제서야 질적인 비약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비교적 더딘 과정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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