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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Oct 19. 2018

한국 노동운동이 일으켰던 나비효과, 중국에서도 가능할까

홍콩 언론에 게재된 노동연구자 챈킹츠의 칼럼

아래 글은 지난 10월 15일 홍콩 인터넷매체 端傳媒(단전매, The Initium Media)에 게재된 노동연구자 챈킹츠(陈敬慈 Chris Chan King Chi)의 ‘韩国80年代工运引发的蝴蝶效应,会在中国发生吗?’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홍콩의 유명한 노동연구자라는데 난 잘 모른다. 생각해보니 이전에 그의 번역된 논문을 하나 읽어봤고, 영어로 된 글을 읽어본 것 같다. 다른 분께서 소개해주셔서 읽어보게 됐다. 대부분 동의가 되고, 특히 중국에서 새롭게 확장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학생 활동가들을 향한 제언이 동의된다. 요컨대 마오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구체적인 노선과 입장을 마련하며, 자유파들과의 전선 확대를 고민해보라는 얘기일 게다.



요즘 알바와 과제로 바뻐서 혼자 읽어보려고만 했는데, 읽고나니 고국의 동포들이 생각나서 어설픈 번역을 하게 됐다. 번역할 실력이 안 되는데 억지로 한 것이므로 분명히 잘못된 부분이 어딘가 있을 것이다. 실은 번역한 김에 이 매체 편집자 분과 메일을 주고 받았다. 곧 답을 주실텐데 허락해주신다면 한국의 좌파 매체에도 게재하고자 한다. 물론 한국 매체에 알아보진 않았다.


아래에서 언급하는 제이식과기유한공사 쟁의 사건이란, 올해(2018년) 여름에 광둥성 선전시에 있는 제이식 공장에서 펼쳐진 노동자 투쟁과 일련의 사회적 반향을 일컫는다. 그때 나는 한창 쓰촨과 구이저우 여행 중이라 몰랐는데, 이 투쟁이 꽤 반향이 컸던데다, 그 전의 투쟁들과 달랐던 점은 유수의 대학들에서 암약하며 활동하던 마르크스주의자 학생 활동가들이 저 머나먼 선전까지 가서(베이징에서 선전까지 가오티에로는 10시간, 일반 가차는 29시간이 걸린다.) 적극적으로 연대했다는 사실이다. 단체티를 입은 걸 보니, 남한 학생운동에도 근근한 전통으로 남아있는 여름방학 노학연대 활동이 떠오른다. 한데 이때 적극 연대했던 학생 단위들은 지금 존폐의 위기에 쳐해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국에 찍힌 게 분명하다. 북경대 마르크스주의학회는 등록을 못 할 뻔해 난리가 났었고, 지금은 남경대 마르크스주의열독연구회라는 동아리가 위기다. 며칠 전부터 들리는 소식이 매우 심각하다. 학내 소식 영상만 봐도 반향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에게 들리지 않는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며 이 글을 번역했다. (나는 요즘 심히 쫄아있기 때문에 얌전히 지낼 것이다.) 노동자듣의 투쟁, 학생들의 헌신적 연대는 나비효과가 될 수 있을까? (아래 글 전문 번역)



신흥공업화 국가의 노동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중국 사회 전환기의 노동 사건에 대해, 보다 강한 시사성을 갖는다. 제이식 사건1)은 지식인과 노동자 간의 관계를 통해 전개된 것이며, 1980년대 초 한국의 노동운동과 일정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갖고 있다.


1980년 광주 대학살 사진. 군대가 전두환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을 체포하고 있 다. 사진: 프랑스와 로숑/감마-라포, 게티이미지


선전 제이식과기주식유한공사(이하 ‘제이식’)의 노동쟁의 사건은 폭넓게 관심을 끈 정치 사건으로 변천했다. 수많은 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이 형사 구류되거나 구속되었고, 사건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성원하는 역할을 한 베이징대학 학생 동아리 ‘마르크스주의학회’가 9월 하순 한동안에는 활동을 지속할 방법이 없게 될 수 있다는 소식도 들리기도 했다. 비록 9월 26일 이 협회가 등록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앞으로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장담하기 어려우며, 다른 대학의 좌익 동아리들 역시 조정(숙정)되거나 관폐될 위기에 쳐해 있다.


이전의 노동 쟁의 사건과 비교했을 때, 제이식 사건이 갖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좌익 학생들이 공식적으로 역사적 무대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학생들이 참여가 없었다거나, 노동자들의 저항 중에서 학생들이 지원하는 역할을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2014년 광저우 판위의 청소노동자 파업, 동관 위위엔 신발공장의 대규모 파업 모두 일찍이 청년학생의 모습이 보였었다.) 사상 의식, 조직 규모, 투쟁 형태에서 봤을 때, 학생들의 참여는 이미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 바 있다.


1970년 한국, 봉제공 전태일의 분신은 광범위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노동자들의 열악함에 관심을 가진 청년학생들이 인도주의적 운동을 시작하게 했다. 널리 알려진 “단 한 명의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전태일의 말은 수많은 대학생들의 가슴을 울렸다. 1980년 광주 대학살 이후, 전두환 정권은 고압적인 정책을 채택했고, 이는 청년학 생들로 하여금 정치운동 전략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수천 명을 헤아리는 학생들 이 공장으로 들어갔고, 노동조합을 새로 세우거나 개조할 시간이 무르익을 기회가 왔을 때, 한국 노동자운동은 정치화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가령 우리는 역사의 발전이 전반적으로 갖고 있는 법칙을 알고 있다. 이때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른 나라의 특정한 발전 단계가 모두 유사한 사회현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신흥공업화 국가의 노동자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중국사회 전환기의 노동 사건을 꿰뚫어보는 데 있어서 매우 강한 시사점을 갖는다. 제이식 사건은 지식인과 노동자 간의 관계를 통해 전개된 것이며, 1980년대 초 한국의 노동운동과 일정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갖고 있다. 이 글은 1980년대의 한국 노동자운동과 오늘날 중국의 차이점과 같은 점을 분석함으로써, 중국의 “학생과 노동자” 좌익 동맹의 미래 발전에 대해 생각할 점을 제출하고자 한다.


전주 : 한국 교회와 중국 노동NGO


"중국 노동NGO는 노동자운동 역사에서 역할이 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와 비슷한 점을 갖는다."


1970년대에 한국의 교회들은 노동자 권익 운동에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그 중 두 가지 가장 중요한 교회조직은 ‘카톨릭 노동청년회’와 ‘도시산업선교회’인데, 둘은 모두 국제 조직의 도움 하에 창립된 조직이었다. 그들의 주요한 활동은 소모임 활동과 노동자 야학을 주최하는 것, 노동법률을 널리 보급하고 노동조합 조직화 훈련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교육했고, 자신의 공장에서 노동자 소모임을 만들었으며, 심지어 기업 노조의 선거에 참여하거나 독립 노조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들은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출발해 열악한 노동자들의 처지와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노동자들에게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노동자들이 제공한 창구를 통해 관심을 가진 학생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한국의 사회학자 구해근은 저작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말하길, “70년대는 (…) 노동자 문제와 관련된 학생들의 주요한 동기는 비인간적인 조건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인도주의의 관심을 보낸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의 당시 방침과 교회의 지도는 큰 구별이 없었다.”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중국어 번역본. 중국의 기층 활동가와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있다.(역주)


1980년대에 접어들었을 때, 한국의 정치와 경제 정세는 변화가 일어났다. 경제적으로는 중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공장 규모와 기술 함량은 증강하기 시작했으며, 보다 많은 남성과 기술직 노동자들에게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정치적으로는, 전두환의 고압적 정책이 학생들로 하여금 공장 조직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게 했고, 많은 이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며 적극적 활동을 할 방법이 없어, 다른 공장이나 지역 노동자의 직업 활동가가 되었다.


1970년대의 한국 노동자운동은 교회와 소수 학생들의 지원 하에서 인도주의 운동으로 드러났다. 학생들은 주로 외부에서 지원했다. 오늘날 통용되는 말로, 그들은 “血汗工厂”2) 노동자들을 지지한 것이었다.


1980년대 들어 노동자의 처지와 환경은 개선되었고, 노동자의 구성 역시 달라졌다. 노동조건 개선의 요구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결성권 등 정치적 권리도 포함하려 했고, 적지 않은 대학생들이 공장에 들어와 일을 했다. 노동자의 신분으로서 다른 노동자를 조직하는 ‘학출 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학생노동자와 노동자 직업 활동가이 함께 움직이면서, 1980년대 정치화된 민주노조운동이 형성되었고, 1970년대의 인도주의 운동과 서로 비교했을 때, 성격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교회는 보조를 따라가지 못 했고, 노동자 리더들은 교회가 노동자 투쟁 측면에서 주장하고 채택해온 온화한 방법에 실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교회의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은 약해졌다.3)


"한국에서 일어난 교회와 비교했을 때, 중국 대륙에 있는 노동NGO는 아직 다른 제한을 갖고 있다. 그것은 곧 법률과 정치적 지위 상에서의 제한이다."


중국의 노동NGO는 노동자운동 역사에서 역할이 있고, 한국 교회와 비슷한 점도 있다. 노동NGO는 이미 유사 교회의 인도주의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면 1993년 선전의 '즈리 장난감공장 화재 참사'4)에서, 87명의 홍콩 여성 노동자들이 사망했는데, 기독교 공업위원회 등 많은 홍콩의 기타의 노동 단체들은 노동자들이 초국적 기업을 향해 배상을 촉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중국 대륙에서 가장 먼저 창립된 노동NGO는 화재가 발생한 후인 19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대부분은 2000년 이후에 만들어졌다. 당시 중국 농민공의 처지와 환경은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해외 기금회들은 대량의 농민공 항목 자금 지원을 시작했다. 이러한 NGO 사업은 공통적 특징을 갖는데, 대부분은 모두 노동자 상해 취재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 항목에 집중된 것이었다. (기업의 허가 하에 노동 법률과 직업안전 교육훈련을 진행한다.)


이런 종류의 해외 기금회들은 성격상, 비정치화되어 있으며, 사회적 약자 집단을 돕는 목적으로서, 그들 주관 하의 노동자 항목 역시 1970년대 한국의 교회들과 유사한 것이고, 노동법의 보급 선전이나 다른 노동자 의법 권익에 협조하면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소조를 만들고 단결 의식과 문화 오락 활동의 제고를 꾀하는 것을 위주로 했다. 2010년 이후,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의 증가와 요구의 급진화(예를 들면, 공회의 민주적 개혁 등)에 따라, 일부 노동NGO 후원자들은 “운동형 노동NGO”의 추진을 제출해야 했는데, 이는 “노동자 권익형”과 “사회서비스형”의 노동NGO와는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고무되면서, 2012년 많은 노동NGO들과 노동권 변호사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 사건에 개입을 높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015년 12월, 수많은 노동NGO의 활동가 들이 갑자기 체포되었고, 그중 5명은 형사적으로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그들 상당수는 “운동형NGO”의 중견자들이었다. 탄압 사건 이후, 이러한 NGO 다수는 폐쇄되거나 소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일부 노동NGO가 “운동형 노동NGO”를 추진했지만, 이러한 모습은 덧없이 사라졌다. (사진 ‘Corbis via Getty Images’)


한국 교회와 비교했을 때, 중국 대륙의 노동NGO들은 여전히 또 다른 제한을 받고 있다. 그것은 곧 법률과 정치적 지위 상의 제한이다. 2012년 이전에 대다수 노동NGO들은 ‘사회집체’로 등록할 방법이 없었다. 단지 ‘상업기구’로 등록할 수 있었을 뿐이어서, 법률의 회색 지대 하에서 활동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등록 정책의 공간이 개방됐다. 일부 서비스 노동자 들의 NGO들은 공익단체 등록에 성공했지만, 2017년 효력이 발생한 “국외 비정부조직 국내 활동 관리법”이 새로운 제한을 가져오면서 자금 원조의 출처에 제동이 걸렸고, 노동NGO의 활동공간도 제한이 생겼다. 법률적으로는 풀뿌리조직만이 중국 경내에 등록된 해외 기금회와 기구의 자조를 신청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특별 안건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사전 정부의 비준을 얻으면, 그제야 경외 인사나 기구의 자조를 받을 수 있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역사적으로 홍콩 자선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노동NGO에 대해 큰 타격과 제한을 가져올 것이다. 많은 NGO들은 관방으로 전환 신청을 하거나 국내 기금회의 자조를 받을 수 있을 뿐이고, 유동아동을 위한 서비스나 지역사회 건설을 촉진하는 활동으로 전환할 수 있을 뿐이다.


억압 전술과 중국당정의 권위주의


"중국 당정은 풍부한 노동자 조사처리 경험을 축적해왔으며, 집정자는 매우 강한 사회 대응 능력(소위 권위인성)을 구비하고 있다. 제이식 사건에서 드러난 것은 학생과 좌익에 대해 상대적인 유연성이었는데, 반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약세인 노동NGO들은 속죄양이 되어버렸다."


한국 군부 정부와 자본가계급의 노동자 및 학생에 대한 탄압 책략 역시 오늘날 중국과 아주 큰 유사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학출들을 해고하거나, 그들을 블랙리스트에 등재한다던지, 주의를 돌려 반대 역량을 타자화하는 등. 한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기층 노조화 활동 중, 대량의 학출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1983년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조운동에 참여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기도 했다.5) 그들은 공장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 지역사회에서 활약했고, 직업활동가가 되어, 서로 다른 기업과 구역의 노동자들, 아울러 서로 다른 노동자 조직들을 연결하기도 했다.


제이식 사건으로 돌아와 보자. 나쁜 일은 짝지어 일어나기 마련이라 하지 않았던가. 제이식공사는 끊임없이 회사 측의 위법 사실을 호소했거나 공회 조직을 준비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인터넷 상에서 자료를 공개했으며, 핑산구에서 노동분과를 건립한 제이식 인사부문의 직원, 그 구역의 기업 인력자원 경영자 그룹에서 다른 기업들에게 노동자 활동가들과 권익보호 확립을 건의해온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까지 포함해 이들의 “고용을 신중히 검토해달라”고 호소했다. 필자가 광저우 자동차부품공장을 조사 연구하던 중에도 불공평한 대우의 공회 지도를 받았음에도 블랙리스트에 등록되는 게 두려워 감히 공개적인 항의를 취하지 못하는 걸 목격했다. 총체적으로 말해, 현재의 중국은 1980년대 초의 한국에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식인과 활동가들의 블랙리스트를 등재하는 상황까지 보이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은 냉전의 최전방이었다. “공산당”은 주류사회의 금기였고, 이 때문에 자본가들은 저항하는 이들의 부모에게 그들의 아들딸이 공산당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거나 빨갱이로 변했다고 알릴 수 있었고, 부모는 파업에 참여한 젊은 남녀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이 하나같이 말했듯이, 그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부모의 반응이었다. 제이식 사건에서도, 이러한 수법이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부모가 압력을 가하고, 부모가 노동자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도록 기도함으로써, 사건을 평정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세력”이라는 구실을 만들어내, 학생과 노동자 사이에 “외부세력”이라는 틈을 트집잡거나, 주변의 노동NGO에 책임을 떠맡기는 것이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공산당’ 혹은 ‘외부세력’에 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위기전가와 내부사회 모순의 수법이 됐다.


하지만 중국은 이론상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주의”를 높이 내세우는 국가다. 더구나 2018년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며, 관방언론들은 연일 마르스스 학습의 고양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통치 전술은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과 같지 않다. 중국당정은 풍부한 노동자 조사처리 경험을 갖고 있고, 집정자들은 강력한 사회 대응능력을 구비(소위 '권위인성')하고 있다. 제이식 사건에서 드러난 것은 학생과 좌익에 대해 상대적인 유연성이었는데, 반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약세인 노동NGO들은 속죄양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정부는 교사와 가장을 동원해서 학생들에게 선전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거나 학교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는 것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후, 그제야 학생을 체포하는 행동을 취했 다.; 신화사의 보도는 마오주의좌파 학생의 역할을 완전히 말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진일보한 급진 학생들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상 근원 :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지난 몇 년, 전통적으로 계급의식이 결핍되어있다고 간주되던 농민공들이 남방의 외국자본 공장에서 연이은 물결로 투쟁을 전개하자, 전 세계 시민사회와 밀접하게 접촉한 노동NGO가 오히려 법률 권익보호 방면에서 실무적 힘을 발휘했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들이 최근 청년학생들의 행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1980년대 한국과 오늘날의 중국은 모두 마르크스주의를 좌익 학생의 중요한 사상 무장으로 삼고 있다. 한국에서 1980년대 광주 민주항쟁은 진압됐고 1981년 전두환의 군사가 정변을 일으켰으며, 민주운동과 노동운동에 있어서는 모두 중대한 쇼크를 가져와, 지식인들이 심각하게 국가와 사회의 미래에 대해 사고하게 해, 급격하게 전략이 조정됐다. 잠재적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서로 결합해, 노동자운동의 정치화를 추동했던 것이다. 이때 마르크스주의가 급속하게 전파되는데, 구해근의 서술에 따르면, “수많은 학생, 지식인, 정치활동가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종속이론 관점 혹은 인민해방신학의 강한 영향으로 집단적 행동을 실행하는 급진적인 사회 개조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시 한국에서는 좌파적 서적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학생들은 학교 바깥에서 많은 시간을 들려 금지된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열독했고, 사회 불평등 등의 원인에 대한 논쟁을 전개 했다. 중산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난 학출 노동자 이선주의 회술에 따르면, 그녀는 당시 일본어를 공부해 좌익 서적을 공부해야만 했다. 이러한 서적들을 통해 동료들과 함께 격렬 한 논쟁을 거쳐, 공장에 가서 인생의 의의를 찾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학생과 지지자들의 선전 글들과 조직 배경을 보면, 절대다수는 마르크스, 레닌, 그리고 마오쩌둥 등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 외에도 소수의 트로츠키주의자와 민주좌익인사의 지지와 성원 활동도 있다. 하지만 베이징의 종합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학회와 삼농(농민, 농촌, 농업) 동아리는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존재해왔다. 수도로서의 베이징의 우위는 사상 활약과 대학이 집중해있다는 것이다. 일부 학생 동아리는 국영기업의 퇴직 노동자에 관심을 쏟고, 일부는 농촌의 발전과 도시 노동자의 처지와 환경에 관심을 갖는다.


지난 몇 년, 전통적으로 계급의식이 결핍되어있다고 간주되던 농민공들이 남방의 외국자 본 공장에서 연이은 물결의 항쟁을 전개하자, 전세계 시민사회와 밀접하게 접촉한 노동 NGO가 오히려 법률 권익보호 방면에서 실무적인 힘을 발휘했다. 이러한 새로운 현상은 모두 청년학생들의 행동을 계발했다.


현재 정치 정세 하의 중국에서, 전총(전국총공회)는 기층 공회(노동조합)에 대해 보다 정교한 억압을 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자주적인 공회를 만드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 되었다.;


좌익 노동자운동의 전망


"중국에서 제이식 사건 이후, 대학 캠퍼스의 좌익 동아리는 과거와 같이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되 던지, 관방과 학교를 믿는 것은 학생 단체에 강한 감시와 억압을 가할 것이고, 아 울러 노동자 정치 개입을 강화할 것이다."


비록 이상 중국 노동운동과 한국 노동운동의 갖가지 유사점을 언급하긴 했지만,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와 학생운동이 한국의 1980년대 초의 상황에 도달한 것이라고 할 순 없다. 혹은, 중국의 미래의 발전 궤적에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한국이 밟은 길을 바로 걸을 것이 라고 할 순 없다.


우선, 중국은 노동자를 지원하고 좌익의 역량을 공감하는 것이 아직 많이 빈약하다는 점에서, 한국과는 상비적이다. 제이식 사건에서도 많은 수의 변호사와 목사, 기자, 교수 등이 나타나진 않았다. 역사상의 원인으로 인해,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노선은 매우 큰 논쟁 속에 있고,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마오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쟁의에 의심과 염려를 갖고 있다. 비록 점차 많은 청년들이 이론과 실천의 논쟁에 가세하고 있지만, 현재의 상황을 봤을 때, 마오좌파 운동은 아직 자유파의 “헌정” 민주운동이 만들어냈던 형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는 1980년대 초 한국의 민주운동 억압 이후에 많은 수의 청년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계발을 통해 좌경화했던 것, 노동자계급과의 동맹으로 정치 변혁의 역량을 찾은 것 등 모든 점에서 다르다. 좌익은 마땅히 상상하고 사고해야 한다. 자유파가 주류를 점하고 있는 “공민사회”나 기타 사회운동과 어떻게 관계를 건립할 것인가? 체제 내의 개혁을 촉진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회 변혁 노선을 가져야 하는가?


다음으로, 양국은 정권의 노동조합 조직에 대한 억압 정도도 다르다. 민주화 이전의 한국은 중국과 같이 모두 단일 노조제도였고, 단지 하나의 총공회만이 있었다. 중국에서 당영도의 중화전국총공회(전총)가 있듯, 한국은 군사정부의 통제를 받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노총)이 있었다. 법률 제도상에서도 다른데, 1970년대와 1980대의 한국은 직장에서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만들 가능성을 갖고 있었지만, 현재 정치 정세 하의 중국에서, 전총은 기층 공회 (노동조합)에 대해 보다 정교한 억압을 하고 있고5), 상대적으로 자주적인 공회를 만드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전총 이외의 ‘독립공회’를 만들어야 하지만 보다 불가능 해졌다.


"제이식 사건은 청년학생들이 “공장으로 가는 것”의 파도를 진일보시킨 격려인가, 아니면 가로 막힌 것인가. 아직은 관찰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제이식 사건은 단지 하나의 기점일 뿐이다. 노동자 조직에 있는 학생들은 수법과 전술에 있어서 바깥 세계가 아는 것은 매우 적고, 전망을 예측하는 것 역시 어렵다. 한국에서, 1980년대 초에 전두환 정권의 엄중한 정치 탄압 하에서, 공장으로 간 ‘노동실천’은 학생운동의 주요한 전술이 되었고, 80년대 중반까지 학생출신의 노동자는 이미 3천 여 명을 넘어섰다. 이를 기초 삼았을 때, 노동자운동의 두 가지 노선의 경쟁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소조 운동”으로, 공장 내의 노동자 소조를 만드는 것을 통해 진보적 의식을 갖춘 노동자 리더를 양성하고 견고한 대중적 기초를 만드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지역을 기초삼아 공장을 초월한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 현 체제를 부정하는 정치 투쟁을 펼치는 것이었다. 두 노선은 논쟁을 거쳤지만, 서로 협력하기도 했고, 1987년의 정치 동원을 창조하는 조건이 되었다.


글 : 크리스 챈(敬滋,Chris Chan King Chi Johnny) | 홍콩도시대학 사회와행동과학과 부교수

역 : 김모두 | 호치민시티 반미 노점상 



1) [역주] 올해(2018년) 상반기 중국 광둥성 선전시에 있는 제이식(JASIC)과기공사(佳士科 技股份有限公司)라는 공장에서 일어난 노동 쟁의 사건.


2) [역주] sweat shop; 열악한 작업 환경, 혹은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노동하는 작업장을 일컬음.


3) [필자]注1:社会学家具海根2004年的著作《韩国工人:阶级形成的文化与政治》(梁光严、 张静翻译;社会科学文献出版社),为韩国1970和1980年代的劳工运动提供了精辟的分 析。此处参见书中第五章<工人-学生>。


4) [역주] 바이두사전 설명에 따르면, “1993년 선전 쯔리 장난감공장 대화재 : 1993년 11 월 19일 13시 25분, 광둥성 선전시 쿠이용현 쯔리장난감공장(재료가공기업)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 87명이 죽었고, 51명이 다쳤다. 다행인 것은 소방대원이 빠르게 화재 현장 에 도착한 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2층과 3층 창문 위의 도난방지 철망을 절단해, 화염 속에 있던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아 시아경제의 2013년 기사(‘방글라데시 참사를 계기로 살펴 본 세계의 공장잔혹사’; http: //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42713092365912)에 따르면, “1993 년 11월 20일, 지리 인형 공장에서 지하 기계실에서 발생한 화재가 자재 창고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커졌던 화재로 87명이 사망했다. 대다수의 사망자의 사인은 질식이었다. 시 관계자가 서방 언론에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이 공장은 작업시간 중에 근로자들이 밖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창문과 공장의 문을 모두 잠가 뒀다고 한다.”


5) [필자]注2:笔者和邱毓斌博士比较1980年代的台湾和1990年代以来中国的劳工NGO时, 有相同的发现。在民主化之前的台湾,新成立的企业工会需要向劳动部门注册,但并不需 要事先得到上级工会(中华民国总工会)的许可,所以知识分子和劳工NGO协助工人成立 独立工会是可能的;但在中国并不可能。见Chan, C.K.C. & Chiu, Y.B. (2015). Labou r NGOs under State Corporatism: A Comparative Study on Taiwan in the 198 0s and Contemporary China. Chinese Labor in Comparative Perspective. Anit a Chan (ed.). (pp. 239 - 278).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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