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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Dec 27. 2018

동아시아 혹은 마르크스주의

권역적 사유와 실천에 대한 메모

내가 왜 이 칼럼을 놓쳤었지.



11월, 나는 상하이 화동사범대에서 여는 이 아시아마르크스주의전파연구소의 행사에 꼭 가고싶었었다. 이 시대에 '관방'일지언정 "아시아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하는 학자들을 만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기차삯도 없는데다, 가봐야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할까 싶어서 가지 않았다.


냉소로 가득한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부여잡은 유일한 끈은 아시아를 아우르는 새로운 변혁의 사유다. 한국 안에서 사회 변혁을 이야기하는 것의 지리멸렬함 속에서 고민의 끈을 이어가다보면, 항상 국제주의의 빈틈이 있었다. 우리 고민과 실천의 빈곤 역시 이 좁은 땅을 벗어나 권역적으로 소통하고 참조하며 사유하면 조금씩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내가 이런 거창한 생각만 하며 사는 건 아니다. 보통은 거의 쓸모없고 소박한 생각만 한다.)


오늘날 아시아의 국제주의는 소멸되다시피했다. 연구자들이 국외의 소식을 소개하거나, 해외에서 벌진지는 투쟁을 응원하는 인증샷을 찍는 게 국제주의는 아닐테지만, 그런 것조차 아무 감정도, 이해의 확장도 아닌, 요식 행위처럼 인식되는 게 오늘날 국제주의의 현실이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조차 국가라는 틀 안에서만 사회변혁을 고민하지, 그걸 넘어서는 문제에 대해선 단지 외생적인 변수로만 여긴다. 누군가 어딘가에서 국제주의적 실천을 한다면, 그게 곧 국제주의이고 무한한 의미가 생길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90년 쯤 전 아시아에서 독립을 고민한 사람들은 나라 밖으로 나가 교류하고 행동했는데, 그때보다 교통이나 통신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간 지금, 그런 실천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존재하지만 감춰지는 미디어의 효과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뜬금 없는 여행 사진. 베트남 호이안 푸젠회관


나는 내가 끈떨어진 배라고 느끼곤 한다. 내 고민이 좋은 실천으로 이어질까. 지금으로선 모르겠다. 부정적이다. 내가 무슨 얘길 한들 그게 좋은 영향이 될까. 그것도 그렇다. 하지만 뭐 아니라고 해봤자 달리 좋은 방도가 없고, 가끔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뭐라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대학1학년 때 동아리 선배가 한 말이 떠오른다. "한국 운동권은 다 망해봐야 돼." 그땐 그 말이 그렇게 싫었는데, 십오년이 지나 나 자신의 뼈져린 삶으로 느껴지니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그 선배가 냉소주의 이상의 의미로 말한 건 아닐테지만 말이다.


어떤 종류의 글에서 사람들은 그 글 말미에, "정치적 상상력이 절실히 요구된다"라고 쓴다. 술을 마실 때도 누군가는 항상 "그걸 뛰어넘어서 정말 새롭게 해야 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래서 정작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는 없다. 지금은 알 수 없으니 함께 구체적으로 모색하자는 것 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주 과격한 수사를 동원해서 혁명이나 변혁, 그런 것들을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유나 실천이 혁명적인 건 아니다. 과격한 수사나 데모가 진정으로 혁명적이거나 사회의 모순을 겨누는 건 아닌데, 어떤 모호한 미망과 낭만주의가 이 블랑키주의적 망상을 지배하고 있다.

한편 세상에서 가장 대세를 차지하는 건 '그딴 건 다 한물간데다 쓰잘데기 없는 공염불이니 실용적 변화가 중요한 것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다. 이건 아메리칸스타일 실용주의 정치에 가깝다. 그러면서 미국이나 북유럽 얘기가 나오고, 그곳과 이곳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결과적으로 무엇을 간과하는 것이며, 무엇을 잃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된다.


나는 이런 말들이 모두 지루하다. 피부에 전혀 와닿지도 않고, 먼나라의 옛날 얘기, 결코 적용하기 어려운 얘기처럼 들린다. 현실에 대한 분석도, 역사적 고찰도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바로 어떻게 된다는 것도 아니고, 뭐가 잘못 됐고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시작해야 한다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덴마크식 어쩌구, 네덜란드식 어쩌구... 다 헛소리 같다. 대체로 뜬금없거나, 한국과의 격차가 너무 크거나, 추상적이기만 하다.


하지만 조금만 벽을 넘어 들여다보면 좀 다른 게 보이기도 한다. 그 사람들에겐 별것도 아닌게 내게는 매우 새롭게 느껴지는 게 있고, 내가 생각치 못한 걸 말하는 것도 보인다. 이상적은 모습은 없고 실패와 좌절, 고뇌가 보이지만, 내 문제처럼 느껴지고, 참조할 것이 보인다. 항상 한국이 생각난다. 이런 게 필요하지 않나 하고... (아마 난... 내 생각과 달리 애국자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거나 몇몇 사람들의 교류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참조하고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라면, 그게 곧 국경을 뛰어넘는 사유가 아닐까 싶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권역 내에서의 사유와 실천이다.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고, 더 많은 참조가 필요하다. 세계 어디에 한국 같은 나라가 있겠냐마는 역사를 통해 돌아보면 참조의 유효성이 가장 많은 것은 아시아라는 권역 내의 사유와 실천이다. 오늘날 서승 선생님의 글이 굉장히 쌩뚱 맞게 느껴지겠지만 지금의 내겐 인상적이라 체크해둔다. 이렇게 소회를 밝히는 칼럼을 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따로 전달받은 논문집도 읽고 있는데, 서승 선생님의 회고는 역시 인상적이다. 아마 자신의 삶으로 쓴 글이기 때문일 게다. 논문 중에서는 김정한 선생님과 연광석 선생님의 논문이 좋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연구자다. 두 분의 글은 모르긴 몰라도 이 심포지움에 참가한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확실히 다른 부분이 있어보인다. 뜻이 맞는 연구를 접하는 즐거움은 아직 길을 찾아갈 방도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중국어 논문은 아직 읽어보지 못 했다. 시간 많이 걸릴 것 같다.


‘역사의 종언’의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의 파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현실의 모순 속에서 현실 돌파의 논리와 방법을 찾아내는 유물변증법적 사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근대 이후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불과 총칼로 이 지역의 민중들의 몸에 ‘아시아’라는 소인을 찍고, 채찍으로 ‘유럽 근대’의 규율을 체화시켰다. 동아시아 민중들은 서구(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노예화라는 범죄에 대항해 인간과 민족의 해방이라는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 역사의 정의를 이뤄내고, 제국주의를 붕괴시키며, 인류해방의 전망을 열어나가려고 해왔다. 민족해방 투쟁의 핵심은 자주·자립·주체이며, 한국의 ‘촛불 행동’은 민중이 주권자임을 천명했고,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과정은 바로 민족주권의 회복을 위한 투쟁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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