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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Jan 06. 2019

메가시티 사막의 오아시스, 피촌

대도시 변두리에서 대안을 만드는 베이징노동자의집

지난 봄 어느 일요일. 989번 버스를 탔다. 도심에서 출발해 베이징 동쪽 교외로 향하는 버스였다. 한두 시간을 달려 점차 도심에서 벗어나면 버스 안은 행색이 대도시 사람들 같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해진다. 물론 '도시 사람'의 외양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이들 역시 이 도시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산리툰(三里屯)이나 왕징(望京) 같은 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과 달라보이는 건 확실하다. 피부는 까맣게 탔고, 옷차림은 남루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얼굴에 피곤기가 역력히 보인다. 그들은 바로 농민공, 농촌 출신으로서 대도시에 와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낮에는 도심이나 주변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수천에서 수만 명 규모의 거주구역 내 작은 셋방에서 잠을 잔다.



베이징은 자금성(故宫)에서 시작하는 순환로와 동서남북으로 구분된다. 2환(二环)에서 시작해 멀리는 6환까지 확대된다. 서울 못지 않은 베이징 집값이 가장 비싼 곳은 2환이다. 3환이나 4환에서는 그중 동북쪽이 좀 더 비싼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베이징에서도 5환 밖으로 넘어서면 조용한 농촌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베이징은 면적 자체가 워낙 넓어 우리나라 강원도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 5환 바깥에 농민공(농촌출신 이주노동자)들의 거주지가 곳곳에 펼쳐 있다. 작년 4월 이래로 내가 종종 찾아가는 피촌(皮村)도 그 중 하나다.


도심에 사는 내가 피촌으로 향했던 첫 여정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토끼굴에 들어간 것과 같은 생경함의 연속이었다. 어느 순간 높은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전쟁 직후의 풍경을 방불케 하는 드넓은 폐허가 나타났다. 2017년 11월에 있었던 베이징 화재 사건과 시정부에 의한 퇴거 조치들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시홍먼(西红门) 지역을 비롯해 펑타이, 창핑, 하이뎬 등 베이징 내 135개 지역에서 벌어진 이 퇴거 조치는 수십만 명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는 보도가 있을 정도로 대대적이었다. 최대 10만 명이 강제 퇴거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나로선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어디로 떠났을까? 고향으로 갔을까, 아니면 다른 마을로 갔을까?


피촌으로 향하는 989번 버스 안에서 ⓒ김모두
ⓒ김모두


피촌은 비교적 깨끗하고 화재 위험이 없다고 판단됐던 모양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생각보다 깨끗하고 넓은 거주구역이 나타났다. 커다란 아치 입구를 지나 피촌으로 들어가면 사막의 오아시스가 나타나듯 갑자기 활기찬 시장거리가 펼쳐진다. 우리나라 읍‧면사무소 소재지와 비슷한 풍경인데, 여기에 옷가게와 슈퍼 등 모든 생활필수품이 모여 있다.


확실히 피촌은 농민공의 마을이다. 현재 피촌 거주자는 약 2만여 명인데, 이중 이곳에 등록되지 않은 외지인이 1만 8천명에 달한다고 한다. 즉, 실제 호적 인구는 2천 명 정도다. 대부분 ‘꽁위(公寓)’라고 불리는 복층 건물에 사는데, 너무 허름해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다. 이곳 주민들은 건물마다 있는 공동 화장실을 쓰고, 건물 안에는 한국의 여인숙과 닮은 작은 방들이 빼곡하다. 방세는 적게는 800위안(13만 원), 많게는 1500위안(24만5천 원) 정도인데, 썩 나쁘지 않다. 시장 물가는 대체로 저렴한데 이곳에서 찾은 한 산시(山西)국수집의 우육탕은 도심에서 먹은 어떤 국수보다 맛있고 깔끔하면서도 가격은 절반인 10위안(1650원) 밖에 되지 않았다.


‘베이징노동자의집’(北京打工之家; 이하 ‘노동자의집’)은 바로 이 피촌에 있는 노동자 문화공간이다. 노동자의집 위챗 계정의 소개글에 따르면 2009년 10월 일군의 활동가들이 모여 공회를 설립하고 이곳에 공간을 일구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는 다양한 교육‧문화 사업으로 확대하고 있다. 베이징노동자의집의 활동 영역은 피촌이라는 2만 명 규모의 농민공 주거지이지만, 이들의 유명세는 전국적이다. 농민공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활동 공간으로 사용하는 건물은 과거에 작은 공장이나 창고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건물을 개조한 것인데, ㄴ자 형태의 단층 건물 두 채에 사무실과 신노동자역사문화박물관‧영화상영관‧극장‧강의실‧식당 등 공공시설이 있고, 그밖에 활동가와 수십여 명의 노동자들이 함께 생활하는 숙소가 있다.


국내에도 피촌은 학자들 사이에서 꽤 알려져 있다. 베이징노동자의집 상임연구자 뤼투(吕途) 저서 『중국 신노동자의 형성』과 『중국 신노동자의 미래』 두 권이 번역돼 있고, 나머지 1권도 곧 번역된다고 한다. 번역된 두 권은 이다. 두 권 모두 나름북스에서 출근됐는데, 베이징에 오기 전 『중국 신노동자의 형성』은 읽은 적 있었는데 피촌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이곳과 깊이 연결되어 활동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알 수 있다.


베이징노동자의집 입구 ⓒ김모두


나는 4월 15일과 30일, 이곳에서  두 명의 청년 활동가를 만났다. 한 명은 상근자인 샤오췐(가명)이고, 한 명은 아직 대학 4학년이었던 야난(가명)이었다. 샤오췐은 상근자였는데 대학에선 중국문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연극이나 노동자운동에도 관심이 많아 이곳까지 와서 활동하게 됐다. 야난은 페미니즘과 사회학에 관심이 많았고, 중국 사회의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어했다. 피촌은 이런 고민을 하는 베이징의 진보적 청년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노동자의집에서 가장 손 꼽을만한 공간은 ‘신노동자역사문화박물관(打工文化藝術博物館)’이다. 여기서 한자 打工의 사전적 의미는 '품팔이 노동'인데, 농민공들이 하는 힘든 일, 혹은 아르바이트를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신노동자라고 번역한 이유는 이 맥락에선 그게 더 의미를 잘 전달하기 때문이다. 신노동자(新工人)란, 즉 ‘농민공(农民工)’을 말하는데, 최근들어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렇게 바꿔부르자고 하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농민공은 ‘농촌출신’이 강조되는 칭호다. 그래서 언젠가는 호적이 등록된 농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임을 상기하게 한다. 하지만 연구자 뤼투에 따르면, 대다수 ‘신노동자’는 가능하다면 계속해서 대도시에 머무르기를 원하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더구나 개혁개방 이후 1세대 농민공을 지나 80~90년대생인 2세대 농민공들이 등장하면서 이는 더욱 강해졌다. 이들은 실제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많고, 도시 생활을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낀다. 단지 부모가 농촌 호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농촌 호적을 갖고 있는 것 뿐이다.


품팔이노동문화예술박물관 ⓒ김모두


당시 우리가 인터뷰한 것은 학교의 가장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이 우리에 대해 매우 신임하고 있었고, 이런 결과로 신뢰도도 매우 높았죠. 그게 2009년입니다. 당시 가장들의 평균 연령은 이미 38세였고, 10년이 지났으니 48세가 됐겠네요. 그건 곧 그들이 농민공 1세대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그들은 베이징에 이미 평균적으로 7년 간 살았고, 피촌에서도 4년 넘게 살아왔죠.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이미 피촌에서 5년, 심지어 10년 간 살고 있었습니다. 한 곳에서 4년, 5년, 10년을 사는 것은 ‘체류’라고 말할 순 없겠죠. (뤼투의 강연 중)

‘신노동자’는 이 농민공들을 보다 주체적으로 호명하기 위한 고민의 소산이다. 피촌에 있는 신노동자박물관은 신노동자 집단의 역사와 정책, 문화, 생활양식, 아동 문제, 여성 등의 쟁점에 대해 전시하고 있는데, 신노동자를 주제로 한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이를 광범위하고 풍부하게 다룬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나아가 십여 년 간 신노동자의 정치적‧계급적 성장을 위해 고군분투해온 노동자의집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내가 처음 갔을 땐 단체 관람 차 방문한 베이징대 마르크스주의학회 학생들도 방문했었다. 당시엔 이들이 몇 달 후 중국 사회를 뒤흔들 논란의 주역이 될지 몰랐다. 박물관만이 아니라, 이들의 진지한 경청과 이곳 활동가 샤오췐의 열정적인 소개가 나를 사로잡았다. 샤오췐는 무려 2시간이 넘도록 이 작은 박물관에서의 연설과 대화를 지속했다. 이런 박물관이 빛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이런 만남이 이뤄질 때가 아닐까?


박물관을 관람 중인 학생들 ⓒ김모두


박물관 옆엔 작은 영화관도 있다. 시설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20평 정도 되는 공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이 있었고, 쇠락한 옛날 영화관에서 가져왔음직한 영화관용 의자가 80여석 정도 있었다.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이런 작은 영화관을 만들고 싶어 했던 오랜 꿈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노동자의집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무료 상영회를 열고, 일요일에는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여는데, 중국 사회를 사실적이고 비판적으로 묘사한 극영화나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담긴 해외 영화들을 상영한다.


이곳의 주요한 행사가 이뤄지는 공간이 바로 ‘극장’이다. 지난 4월 30일 저녁에 열린 노동절 기념 ‘만회’(일종의 저녁 문화제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이곳에서 열렸다. 이곳에 대해 아직 잘 몰랐을 땐 과연 얼마나 많은 인근지역 노동자들이 참여할지 의구심이 들었다. 노동자의집 자체가 피촌 울타리 외곽에 있거니와, 이 작은 동네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얼마나 올까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것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알게 됐다. 행사 시작 2~3시간 전 즈음부터 마실 나오듯 모여든 사람들은 7시가 되자 마당을 가득 채울 정도가 됐다. 마당에선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의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기부한 물건들을 저렴하게 팔고 있었고, 주민 몇몇도 자기 물건을 가져와 팔기도 했다. 딱지치기나 인형놀이를 좋아하는 꼬마 아이들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녔고, 하늘에선 인근 베이징수도공항을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이 수시로 지나갔다.


4월 30일 노동절 전야제 행사의 프로그램을 적고 있는 자원활동가 ⓒ김모두
노동절 전야제 행사 포스터. 포스터는 거창하지만 실제 전야제 분위기는 굉장히 귀엽다.


저녁 7시반이 되자 문화제가 시작됐다. 극장 안은 이미 발을 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빼곡해졌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3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숫자가 눈에 띌 정도로 많았다. 언뜻 보면 어린이 장기자랑대회에 가족들이 참관하러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였다. 한 청년 노동자와 중학생이 공동 사회를 맡았는데,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의 역할을 나누고 있었다. 공연 구성 역시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는데 정치적 내용보다는 가족적이고 지역 축제와 같은 분위기가 훨씬 강했다. 노동절의 의미를 환기하거나 신노동자의 자부심을 강조하는 멘트도 심심치 않게 들렸지만 표면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인지라 누구에게도 위화감있게 들리진 않는 것 같았다. 이곳 소학교, 중학교 아이들의 공연이 많았고, 지역 주민의 노래, 활동가들의 연극 공연도 있었다. 연극 공연이 가장 기대됐었지만 아쉽게도 음향 문제가 잦게 일어나 제대로 경청하긴 어려웠다.


공연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곳에 오기 전까진 전국 대도시를 전전하던 농민공들로, 피촌의 평범한 주민들도 있고, 이곳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평상시에는 문학소조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이곳의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하고, 이렇게 문화제가 열리면 가족들과 함께 참가하는 것이다.


1시간반에 걸쳐 진행된 문화제는 신노동자예술단 소속 쒸뚜어(许多)의 공연으로 끝났다. 그는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生活就是一场战斗)라는 노랠 불렀다. 이 곡은 쒸뚜어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로, 머나먼 타향에서 살아가는 신노동자의 거친 삶과 절망, 의지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의 노래가 끝났을 즈음 극장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자리를 뜨고 20대~50대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남아있었는데, 이들은 유행가처럼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실제로 신노동자예술단은 신노동자의 삶과 노동을 노래한 음악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매년 전국 투어 공연을 한다. 2018년엔 구이저우와 윈난 등 남쪽을 중심으로 공연을 했는데, 마을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이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김모두


최근들어 부쩍 노쇠한 것처럼 보이는 한국의 사회운동에 반해 이곳의 활동은 이제 막 태어난 생기 넘치는 운동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들은 때로 한국의 70~80년대 노동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같은 영화를 보고 토론하며, 자주적인 민주적인 노동자운동의 가능성을 점치고 고민한다. 이런 고뇌의 소산이 이곳 노동자의집에 모여 있고, 이곳엔 그런 열정으로 넘치는 활동가들이 모여든다. 4월 30일 저녁 역시 베이징과 인근 도시 곳곳에 있던 활동가들이 모여들었었다. 이후에 6월과 10월, 11월, 12월, 며칠 전인 1월 1일에도 갔었는데, 그때마다 베이징의 어딘가에 숨어있던 진보적인 청년들과 연구자들이 모이곤 했었다. 학생이거나 노동자, 지식인인 이들은 이 거대한 도시에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든든한 동지가 아닐까. 그래서 버스 2시간을 타고 그 먼길을 지나 이곳까지 오는 게 아닐까.


샤오췐은 몇 달 후 베이징노동자의집 상근활동을 중단했다. 상근 기관에서 그를 향한 감시와 견제가 있었고, 그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심했기 때문이다. 피촌 역시 마냥 자유로운 공간만은 아닌듯 하다. 4월에 피촌에서 처음 만났던 샤오췐은 다음날 위챗 펑여우촨에 이런 글을 남겼었다.


오늘의 역량(이날 베이징대에서는 인상적인 대자보 시위가 있었다)을 확인함으로써, 나는 이 사회가 보다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예전보다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지원 활동으로 왔던 한국 친구를 떠올려보면, 그는 중국어를 배우려 엄청 노력하고 있는데, 한국의 노동조합에서 활동했었으며, 지금은 중국에 유학을 왔는데, 동아시아의 노동자들의 단결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그의 이상과 우리는 같다. (…) 그 역시 대학 때 노동자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서 이 사업에 의연히 뛰어들었다. 비록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나는 충만한 동지애를 느꼈다. 이와 같은 사랑은 모든 담장을 뛰어넘는다.


베이징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청년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다. 하지만 쉬운 일도 아니다. 중국인들이 먼저 공개적으로 중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표현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인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야 점차 알아갈 수 있다. 내가 이들을 하나둘씩 만날 수 있었던 건 피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촌의 활동이 별 게 아니라고 할 수도, 혹은 대단히 별 것인 것처럼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곳이 피촌 농민공들이 '다른 삶'을 고민하는 터전이기도 할뿐만 아니라, '사회 변화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나아가 베이징노동자의집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전국 곳곳으로 전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이곳이 오아시스처럼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다.


ⓒ김모두
ⓒ김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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