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아시아 - 한국 지식인들의 아시아 기행> 서평
요며칠간 장세진의 <슬픈 아시아 - 한국 지식인들의 아시아 기행(1945~1966)>을 읽었다. 저자는 한국 문학 연구자로, 박사 논문으로 <상상된 아메리카와 1950년대 한국문학의 자기표상>(2008)을 쓰고, 일본 가쿠엔대학과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연구한 바 있다. 주로 한국 사회의 집단적 냉전 문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관해 연구해왔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런 연구의 연장선상에 있다. 해방 직후부터 베트남전쟁 이전까지의 21년 간, 정책 입안이나 기자, 문인 등 한국의 다양한 지식인들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고 남긴 기록을 통해 당대 한국의 국가주의적 도취와 시대 의식이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는지 살피고 있다. 저자가 최초의 질문을 던진 사건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분위기였는데, 당시 일본 시민사회가 베트남전쟁에 대해 적극적인 반전 운동을 벌인데 반해, 한국 사회는 한국군 파병에 대해 놀라울만큼 일방적인 도취와 환희, 기대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대체 왜 그렇게 됐는지 응당 던질 수 있는 질문일 거다.
저자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해방 직후로 돌아간다. 당시 엘리트 지식인들은 인도네시아와 인도, 홍콩, 타이완, 일본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로 이제 막 기행을 하기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일본과 중국 외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지극히 무지했었기 때문에 거의 지도를 그리는 수준이었다.
인도네시아 여행을 했던 시인 박인환의 경우 '동양'과 '약소민족'을 '구미'와 '제국주의'의 대립항으로 나란히 설정했는데, 이처럼 해방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아시아'라는 단어를 자주 '약소민족'을 의미하는 광범한 메타포로 사용했다. 나아가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을 펼쳤던 일본은 아시아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아시아라는 지역주의적 감각엔 '해방'과 '자유'가 자리했다.
하지만 동시에 당대의 우파 지식인들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대해 큰 반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주로 여행한 지역은 아시아 중에서도 타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타이완, 인도, 파키스탄 등 비공산권 국가에 치중되어 있다. 반면 베트남이나 라오스, 버마, 중국 본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한다. 여행지 선택 자체도 냉전 페러다임 속에서 정해진 것이다.
아직 미군정이 남한을 통치하던 때인 1947년, 남한의 뭇지식인들은 인도 뉴델리에서 처음 열린 범아세아대회에 주목하게 된다. 이 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아시아에 그토록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서양'의 대립물로서 '동양'을 떠올리도록 교육받은 세대로서는 '문화 충격'이었다. 당시 참가자들은 여전히 식민지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으로 인도를 바라보고, 인도의 야만성을 묘사한다. 나아가 여기엔 대동아공영권의 유산도 남아있었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부 조선 사람들은 동남아시아에 '점령군'으로서 쳐들어갔을 때 '일본군'의 자격으로 참전하고 때로는 일본군보다 더 충직한 신민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해방 직후 타국을 찾은 지식인들은 왕왕 해외에서 비난을 듣기도 하며, 당시의 상황에 대한 부끄러움도 동시에 느껴야 했다.
반면 일본에 대한 남한 자유파 지식인들의 감정은 지극히 이중적이어서, 폐허가 된 히로시마를 지나며 묘한 감정을 느끼고,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일본인들을 보며 기이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며, 또 한편 일본이 빠르게 폐허를 복구하고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며 조급함을 느끼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정서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일본 경제가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 있다는 얘길 들으며 안도감을 느끼고, 뉴스에선 이따금 한국 경제가 언제쯤 일본을 추월할 수 있을지 예측하는 보도가 나오고, 또 세계 시장에서 K-POP이 일본 대중가요를 압도하고 있다는 소식에 우쭐해 하기도 하지 않나.
중국에 대해선 어떤가. 1949년 초 <경향신문>의 중국 특파원이었던 김병도는 국공 내전이 한창인 중국 대륙에서 내내 비관한다. 서양의 거대 자본이 선호했던 국제도시, 자본주의의 호화스러움과 아편에 중독된 인간 군상이 대조를 이루던 "기형적인 메트로폴리스" 상하이는 곧 홍군의 공격 앞에 무너질 것이었다. 얼마 후 김병도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김병도는 그것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극심한 부패와 중국인들의 개인주의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당시 한국엔 이승만 정부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가 나붓기고 있었는데, 이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득세에 맞선 집단주의적 슬로건이라 할 수 있다.
김병도의 이런 관점은 홍콩과 타이완에서도 지속된다. 물론 타이완을 방문했던 지식인들의 여행기는 다른 사람들의 것도 소개되어 있는데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막아내려면 토지 개혁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던 소설가 이무영 등이 그렇다. 공산주의는 민중의 가난을 파고들어오기 때문에 지극히 불평등한 상태에 놓여있던 토지 문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사회주의자들이 더욱 득세할 것이란 게 당대 우파 지식인들의 생각이었다.
이처럼 이 책은 1945년부터 1966년 사이 여러 자유주의지식인들의 기행록을 바탕으로 '아시아'라는 정치적, 사상적 공간감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돌아본다. 결국 한국이 미국 정부의 미적지근했던 반응을 극복(?)하고 베트남전쟁에 파병함으로써 많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던 것은 이런 인식의 누적을 통해 형성된 일종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발전국가로서 일본을 넘어서겠다는 욕망, 상대적으로 뒤쳐져있으며 나아가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공산화의 위협'(?)을 받고 있는 동남아시아를 구출하겠다는 오만과 공포 등이 기이한 대중적 환희를 낳았고, 많은 사람들을 역사적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 빠뜨리고만 것이다.
나는 이런 사상이 단절되거나 극복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한국 사회를 끊임없이 재규정하고 있다. 이를테면 베트남에서 국민영웅 취급을 받고 있다는 베트남 축구대표팀 박항서 감독이나 K-POP의 대중적 열광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시켜 괜한 추태를 부린다던지, 근거 없는 도취에 빠진다던지 하는 것은 여전히도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근대적 열망 안에 있다. 즉,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아시아에 대한 우익사상적 기원을 살펴볼 수 있다. 그건 단지 소위 "보수우파"들만이 지켜온 게 아니라,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갖고 있는 한계다. 우리는 그 한계 속에 위치해 있다. 2012년 이 책이 출간됐을 때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엔 책 제목을 ‘배반의 아시아’라고 짓고 싶었어요. 아시아 각국들은 미국이 ‘너희들은 따로 봐 줄게’라고 하면 동맹이나 약속을 쉽게 깨버렸지요. 미국을 통하지 않고선 소통도 하지 못했지요. 한국이 초대받지 못했던 1955년 반둥회의만 해도, 우리와 비슷한 식민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들이 모였는데도 미국의 시선에서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 그래도 일본은 그나마 베트남전쟁의 반대 목소리가 존재했어요. ‘베헤이렌’이라는 시민단체는 미국 탈주병들을 숨겨주기도 했지요. 우리는 너무나 합치돼 열광하기만 했습니다. 동지의식이나 연대감은 사라지고 전일적인 반공 서사만 남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