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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명교 Apr 12. 2019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패배하는 싸움들

헌법재판소 낙태죄 위헌 판결

1년 만에 야근이란 걸 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오늘은 내 '술 약속 없는 생일'이었지만, 서촌에서 궁상맞게 혼자 술 먹는 것보단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쭉 앉아있었다. 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밤 늦게 집에 오는 길에 오늘은 어떤 날이었나 생각해봤다. 


오늘 헌법재판소에서 하나의 중요한 승리와 하나의 알려지지 않은 패배가 있었다. 승리는 낙태죄 위헌 결정이고, 패배는 "종업원이 부당노동행위를 한 혐의로 처벌받을 때 회사 법인도 함께 처벌받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단"이었다. 후자에 대해선 알지 못했는데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두 결과는 가히 모순적이다. 하나는 여성들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온전히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결정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이 앞으로 사측 관리자로부터 일련의 탄압을 받을 때, 이에 대해 사측의 귀책을 물을 수 없다는, 즉 개개의 탄압은 개개인의 것이라는 황당무이한 판결이다. 불 보듯 뻔하지만 이는 자본이 노동조합을 탄압할 여지를 더 넓힐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있는 몇몇 나라들은 죄다 대동소이하겠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헌법재판소의 존재 가치가 의심스럽다. 오늘 낙태죄 위헌 판결은 너무도 정당한 결론이지만, 실은 이런 당연한 문제는 대중들의 요구와 여성들의 외침에 기반해 정치인들이 입법부에서 법 개정을 통해 해결했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정치는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선 안 되는 일들의 난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정작 해야할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정치와 사회운동의 난맥상에 막힌 일들은 죄다 사법부를 향한다. 


정치가 사법화되니 모든 사안들이 사법부 앞으로 쏠린다. 카메라는 사법부 대문 앞에 세워져 있고, 세상의 모든 불만들, 절망어린 목소리들은 사법부를 향한다. 계급투쟁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매스미디어가 가장 열성적으로 비추는 곳은 유튜브와 인터넷 상의 격론장과 사법부 대문이다.


반면 헌법재판소는 사회적 이목이 쏠리지 않는 사안에 대해서는 노동권을 후퇴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사안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느끼는 헌법재판소란 여론의 입장이 분명하게 쏠리는 사안에 대해서는 (다행히도) 여론의 꽁무니를 쫓아가고, 그렇지 않은 사안들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판결을 내린다. 이를테면 박근혜 탄핵 사안에 대해서, 그리고 이번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여론에 따라 판결을 내렸지만, 여론이 무관심하거나 신경쓰지 못한 문제에 대해선 여지 없이 인민의 등에 칼을 꽂고 스스로 위헌적 결정을 내렸다. 하기에 2년 전 헌법재판소에게나, 검찰청의 몇몇 스타 검사, 몇몇 멋진 변호사들에게 쏠리는 대중과 매스미디어의 열광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한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은 대체 뭐가 좋다고 저렇게 환호하는 걸까...하는 생각만 든다. 이렇게 간다면 대한민국 땅의 모든 절규들의 종착지는 오직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되고말 것이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형상이다. 



누가 9명의 헌재 재판관들에게 헌법에 대한 판단의 권리를 준 걸까. 헌법재판소의 존립 근거란 대체 뭘까. 난 잘 모르겠다. 애시당초 법원들이 헌법의 원칙에 근거해 제대로 판결했다면 이런 불안정성이 만들어지지 않지 않았을까? 혹은 사안의 쟁점이 첨예하게 갈라지더라도, 어느 정도는 명확한 기준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입법부가 제 역할을 했더라면, 모든 정치적 쟁점이 사법부에 쏠리는 현상이 심화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혹은, 행정부 테크노크라트들이 사실은 거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면서 무능한 입법부를 자신의 도구처럼 사용하고 있는 현상이 심화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 근본적으로 이 사회(운동)가 아래로부터 건강한 역능을 유지하고 있다면, 사회의 모순들이 극소수의 테크노크라트, 판사 검사 등 사법부 수장들에게 쏠리는 현상을 저지하고, 넓은 의미의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하기에 나는 오늘 중요한 승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승리가 '미투'를 비롯한 조직된 혹은 조직되지 않은 여성운동(들)의 분투에 의한 승리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멈추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은 거꾸로 가고 있고, 우리는 사안들 안에서 분투하고 있는 가운데,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대체로, 사법부나 입법부, 행정부 등에서의 경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의 회생과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한데 요즘엔 사회운동이 무너지고, 사회운동이 마치 봉사활동처럼 취급되고, 나아가 사회운동이 행정부가 채우지 못하는 어떤 요소의 보충제처럼도 위치하게 되면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 대학사회의 지식인들이 사회운동의 꿈은 버려도, 세상을 위해 뭔가 해볼 것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은 로스쿨에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언론사에 취직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지치고 실망한 후, 어느 정도 멀어지고나니 이런 모습들이 더 크고 절실하게 다가온다. 나는 다시는 절대 넘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왜 또 넘어졌을까. 


두 달 전 쯤 지금보다는 절망감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땐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엄청 많이 했고, 밤마다 잠에 들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당분간은 하루하루 충실히 보내고, 생각하고 공부하며 살아야겠다. 절망에 이기는 방법은 억지로 희망을 품는 게 아니라, 절망에 충실하게 마주하는 것 뿐인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tv에 김사월이 나왔다. 넋 놓고 봤다. 그런데 tv 속의 김사월도 많이 긴장했는지 노래가 안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그의 노래들처럼 불안했지만, 그가 tv에 나오는 스타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느꼈다. 아빠에게 실컷 김사월에 대해 이야기했다. 잘 이해하시지 못하는 것 같았고 하겐다스 아이스크림만 열심히 드셨지만... 뭐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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