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행 엑서더스> 서평
<북한행 엑서더스>를 읽었다. 일본계 오스트레일리아 연구자 저자 테사 모리스-스즈키는 1958년부터 1967년까지 실시된 재일조선인의 북송(귀국) 사업의 전말을 파헤친다. 이때 재일조선인 숫자가 대략 60만 명인데, 그중 무려 9만 명이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중 90퍼센트는 북한과 아무 연고도 없는 남한 쪽 출신이거나, 조선어를 잘 쓸 줄도 몰랐다. 문제는 이 과정이 매우 여러 모순으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재일조선인들은 상당수 제주도 및 남해안 출신이었는데, 한반도에서의 우익 테러와 4.3항쟁 등으로 정국이 매우 불안한데다 남한이 심하게 극빈했기에 귀향을 택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서의 삶도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제 시기 강제징용된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었는데, 일본에서 국적도 없었고, 어떤 사회부조도 받기 어려웠기에 해방 이후에도 내내 2등국민의 삶을 지속해야 했다.
일본 정부는 좌익 지지가 높고 극빈층이 많은 재일조선인을 줄이고 싶어했고, 일본 좌익들은 어줍잖은 "인도주의" 논리로 당사자가 가고싶다면 보내주어야 한다고 문제를 단순화시켰다. 남한 이승만 정권은 이 사업이 못마땅해 극렬히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남한에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다. 소련은 1956년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이후 일어난 평양 내 소련파 및 연안파의 반김일성 모의가 실패로 돌아간 후 소원해진 김일성 정권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싶어했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일본 정부의 제의를 의심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다가 대규모 귀국사업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실효가 많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는 1958년 이뤄진 북한 내 중국인민해방군 30만명 철수 후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는 체제우위를 선전할 수 있다고 여겼다. 또, 미국이 일본의 결정을 격렬히 반대할 것이기에 미국과 일본의 분열도 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김일성은 북한에 올 재일조선인에게 10만 호의 아파트를 제공할 수 있다고 허언했다.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태를 객관적으로 직시해 사업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북한과 일본 적십자사는 적십자의 기본원칙은 잊고 그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대리자의 역할에만 충실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 역시 동아시아에 대해 무지했고, 어영부영하다가 아무 원칙도 지키지 못한 채 이 사업의 모양새만 만들어주는 역할만 했다.
이 대규모 귀국사업의 귀결은 무엇이었을까? 저자 테사 모리스스즈키는 결과적으로 무수한 난민과 이산가족의 재생산, 평범한 사람들의 끔찍한 불행이었다고 본다. 물론 이 연구의 한계는 북한 내의 귀국자들을 거의 인터뷰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또, 저자가 리버럴리스트로서 휴머니즘의 시선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도 있다. 저자는 당시 귀국을 택한 조총련 지지 재일조선인들을 그저 순진무구한 난민으로서만 바라볼 뿐 정치적 선택의 주체이기도 했음을 인정하려 하진 않는다. 정보 제공이 미흡하고, 조총련의 선전이 지나치게 징밋빛으로 가득해 도착하자마자 실망했다는 증언이 많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휴머니즘이 이 광범한 연구 및 역사 추적의 원동력이기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