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를 떠나기 직전, 수도 브라티슬라바서 40km 정도 떨어진 트르나바(Trnava)를 마지막으로 둘렀다. 슬로바키아 여행 중 막판에 차 운전으로 우리들의 발이 돼준 지인 교수네 집을 두를 겸 해서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작은 도시 트르나바는 또 다른 느낌의 격조를 갖춘 도시였다. 아닌 게 아니라 트르나바는 ‘슬로바키아의 로마’ 또는 ‘작은 로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로마와는 무관하나 사연인즉슨, 이 작은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벽과 위엄 있는 성당과 교회들이 로마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란다.
16세기 오스만 터키가 헝가리를 침공했을 당시, 헝가리의 옛 수도인 ‘에스테르곰’에 있는 대주교 성당이 이쪽으로 옮겨온다. 이후 가톨릭 종교개혁의 선봉이 된 예수회 교단이 이 도시로 오면서, 이 도시는 프로테스탄트에 맞서 헝가리 내 반종교개혁의 성지가 된다. 17세기 예수회 교단이 세운 트르나바 대학은 당시 헝가리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근세에 들어와선 이 대학이 헝가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슬로바키아 민족운동과 민족교육의 요람이 된다.
슬로바키아는 어느 곳을 가도 성들이 많다. 이 조그만 나라에 무려 성이 180개가 된다는데, 이곳이 오스만 터키를 막는 유럽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이리라. 트르나바 안에는 성벽만이 있고 궁성은 볼 수 없었지만, 이것 말고도 이 조그만 도시에 큰 대학과 교회, 성당이 그득하여 나름의 기품이 있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아내가 정작 감동을 받은 것은 교회와 성당도 그렇거니와, 이들을 일상의 곁에 두고 살아가는 지인 교수의 집 때문이다. ‘예체크’ 교수의 직장은 체코에 있는 지방대학이나, 집은 이곳 트르나바다.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둔 단출한 집안인데 전공은 경제학이나, 집안엔 동양적 소품들이 많아 이 양반의 취향을 짐작케 했다.
우리가 기차 시간을 맞춰야 하기에 같이 저녁 식사를 한 건 아니고, 부인이 애프터눈 티 세트로 다과를 준비하고 피아노도 연주하며 잠깐이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하창고로 데려가서는 몇 가지 홈 메이드 과일 잼을 건네줬다.
아내는 이러한 대접에도 즐거워했지만 예쁜 화분이 놓인 거실의 창문 발코니 너머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보이는 것에 감동해했다. 한국의 아파트에서 늘 무미건조한 풍경만을 보다가, 예체크 교수 가족이 나름의 스토리텔링이 있을 법한 유서 깊은 도시 속에서 이러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꽤 부러워 보였나 보다.
2015년 당시 체코 교수의 월급은 한국 돈으로 200만 원이 훨씬 안 되는 것 같았다. 교수들에게 직접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고 한국 교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충 그런 것 같았다. 더러 한국어를 하는 체코 교수들이, 우리 교민들이 법률 공증 같은 걸 하거나, 병원에 복잡한 상담을 하러 갈 때 도와주고 사례금을 받기도 하는데 이걸 크게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체코 교수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학술지원금을 약간만 받아도 자신들의 연구 활동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체코는 과거 사회주의 체제의 영향으로 의료비나 교육비가 거의 무상이고, 연금체계 등이 나름 건실해서 실제로 애들을 키우며 먹고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는 것 같았다. 일단 체코의 식료품 가격은 한국의 딱 절반이다.
체코의 교수들을 보면 진짜 다른 것 눈치 안 보고 공부하고 싶은 자들만이 교수직을 선택하는 것 같다. 그런 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 같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 중엔 교수 월급이 모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보다 못하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이들이 있다.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교수라는 직업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 분통을 터뜨릴 일은 아닌 것 같다.
트르나바의 예체크 교수 집을 둘러보고, 나름의 역사를 곱게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에서 크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집을 예쁘게 꾸며놓고 소박하게 손님을 맞으며 살아가는 모습이, 나도 나지만 아내에게는 큰 부러움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