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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부다페스트, 그리고 파리의 야경

by 양문규

우리 애들을 볼 것 같으면, 젊은이들은 여행을 가면 높은 곳에 올라가 탁 트인 풍경을 내려다보거나, 또는 야경을 보는 관광을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이 둘을 다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는 일단 다리가 힘들어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걸 싫어한다. 유럽의 종탑 등을 올라가려면 가파른 나선형의 비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어지럼증도 난다고 한다. 나는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꼭 그런 데는 입장료를 받아 아내가 싫다면 얼씨구나 하고 관둔다.


야경은, 두 사람이 다 스태미나가 빵점인지라, 여행 가서 저녁을 먹고 나면 숙소 침대에 벌렁 누워 한숨 돌리는 걸 더 좋아해 꺼리게 된다. 그러나 체코서 일 년을 살게 되니 프라하의 야경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아니 야경을 보는 것은 그냥 일상이었다. 프라하의 야경은, 한밤중보다는 땅거미가 지고 블타바 강에 하나씩 불이 들어올 때 찰스 교에서 프라하 궁성의 비투스 성당을 올려다보는 순간이 제일 좋았다.


내 경우 안식년이 가을 학기부터 시작돼 프라하에 가자마자 추석을 맞았다. 추석날 밤 달리 할 일이 없기에 보름달이 뜬 프라하 궁을 올라가서 야경을 볼 수 있었다. 고딕의 비투스 성당은 불빛에 비치니 보석이 달린 거대한 황금 왕관으로 변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사람들 말로는 체코 사람들의 조명기술이 뛰어나 야경의 효과가 백배라고 한다.


조금 다른 얘기 하나 하자면, 내가 사는 지역 방송의 아나운서들은, 방송 바깥에서 보면 하나같이 인물이 좋은데, 방송에만 나오면 영 아니고 스튜디오도 엉성하게 나와 담당자에게 물어봤더니 중앙 쪽에 비해 조명 장비나 기술이 부족하기도 때문이란다. 프라하의 야경을 두루 보며 내린 결론은, 물론 프라하 건물 자체의 위용과 아름다움도 있지만, 그쪽의 세련된 조명기술이 이에 한몫 거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야경(1).jpg 블타바 강변(상), 찰스 교에서 본 프라하 궁성(중), 비투스 성당


헝가리 부다페스트 야경도 프라하에 못지않다고 한다. 프라하 대사관의 어떤 이는 프라하가 여성적 도시라면 부다페스트는 남성적 도시라며 여성들은 대체로 섬세한 프라하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내가 부다페스트를 살아본 것은 아니니 뭐라 말할 순 없으나 야경을 비교하면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를 가는 게, 비엔나를 가는 것보다 시간은 조금 더 걸린다. 부다페스트를 갔을 때는 마침 2월이라 날씨가 꽤 추웠다. 부다 궁궐 인근에 있는 ‘어부의 요새’ 성곽이 야경의 뷰포인트이다. 이곳은 두나 강을 내려다보는 비교적 높은 언덕배기에 놓여 있어 추운 중에도 더 추웠다. 해지기 전부터 야경을 기다리다가 도저히 추위를 참을 수 없어 인근 카페로 피해 들어갔다.


쌍화탕 맛이 나는 뜨거운 와인을 시켜 몸을 녹이면서, 옆 자리에 그리스서 왔다는 커플에게 댁들은 언제쯤 야경을 보러 나갈 거냐고 물으니, 자기네는 두나 강변의 힐튼 호텔에 묵어 거기서 보면 훨씬 잘 볼 수 있다고 뽐(?) 냈다. 밖으로 다시 나갔는데 야경이고 뭐고 손이 곱아 사진기 셔터를 못 누를 정도였다. 그 와중에 코가 새빨개져 바이올린을 켜며 적선을 구하는 악사도 있는데, 우린 그까짓 야경 못 보면 그만이지 하면서 ‘부다’에서 ‘페스트’에 있는 숙소로 미련 없이 철수했다.


다음날 낮부터는 극적으로 날씨가 풀려 결국은 야경을 볼 수 있었다. 추웠던 전날 밤 야경은 살벌하기 그지없더니 그 날은 역시 명불허전의 광경을 연출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프라하와 달리 마치 헝가리 작곡가 리스트의 웅혼한 교향시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왜 그럴까 싶었는데 아마도 프라하 블타바 강보다 확연히 드러나 보이는 두나 강과(한국인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 사고가 났던 그 강이다!) 그 강변을 압도하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풍의 국회의사당 건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당시 부다페스트는 경쟁 도시였던 비엔나의 국회의사당에 꿀리고 싶지 않아 이 웅장한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야경(2).jpg 마차시 교회(상), 두나 강 쪽의 세체니 다리와 국회의사당(중), 국회의사당(하)


끝으로 파리 야경은 처형이 아니면 아마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부부가 체코 온 사이 남편을 저 세상에 떠나보낸 처형을 위로할 겸 프라하로 초대했다. 유럽 여행이 처음인 처형에게 유럽서 제일로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파리 에펠탑’이라 해서 우리는 그 소박함(?)에 다소 실망했지만 본인이 그걸 가장 보고 싶다는 데야 토를 달 일은 아니었다. 사실 처형과 함께 그곳을 가지 않았으면 우리 주제에 파리 야경을 구경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에펠탑의 일루미네이션은 유명한데, 우리는 에펠탑 앞에서 출발해 센 강을 따라 파리 야경을 보고 다시 에펠탑으로 돌아오는 유람선 관광을 하게 되었다. 매일 밤 정시에 에펠탑의 수만 개 전구가 축제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하면 유람선이 출발하는데 ‘파리는 언제나 축제’라는 책도 있지만, ‘축제의 도시’, ‘빛의 도시’ 파리임을 실감 나게 한다.


어떤 여행 칼럼니스트는, 센 강의 야간 유람선은 물 위에 떠다니는 보석상자 같은데 절망적 이리만큼 낭만적 모습이라 했다. 그러나 그날 파리 각처를 구경하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저녁이 되자 열 대가 넘는 대절버스로 속속 유람선 선착장에 도착해 도떼기시장이 되는 바람에 그렇게까지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파리야경.jpg 에펠탑의 일루미네이션(상), 유람선에서 본 노트르담 성당(하)


이렇게 해서 나는, 누가 한 말인 줄은 모르지만 유럽서 가장 아름답다는 삼대 도시의 야경을 다 봤다. 본 감상은 한 마디로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다.’ 학과의 동갑내기 짝꿍 선생은 한 번도 유럽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한테 지지 않으려고 자기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 등을 빠짐없이 봐 간 거나 진배없다고 얘기한다.


맞는 말이다! 나는 체코서 일 년을 살았어도, 막상 TV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 안 가본 데도 많고, 또 정작 가봤어야 할 곳은 다 빼놓고 갔다. 그리고 설사 갔더라도 그곳 자체를 보고 왔다기보다는, 사전에 주어진 정보에 의해 정형화된 모습이 과연 거기에 그런 모습으로 있는지를 확인하고 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럼에도 여행을 하면 사소한 것일지언정 추억이 남는다. 어느 추석날 밤 아내와 프라하 궁성에 있었던 추억. 얼어붙었던 부다페스트의 야경. 처형과 함께 했던 파리의 야경. 이런 추억들이 어떤 때는 자신의 기억 안에 중요한 그 어떤 것으로 자리 잡을 때도 있고, 때로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여행의 추억이란, 걸어서 하늘까지 가려면 마음 구석에 하나쯤은 달아 놓아야 하는 풍경(風磬)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삶의 시간이 지루하고 무의미할 때 저 아득한 곳에서 물컹하며 들려오는 풍경 소리 한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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