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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견공들

by 양문규

나는 오랜 기간 집 바깥에서 조깅을 해왔는데, 체코로 안식년을 갔던 1년간은 전혀 하지를 못했다. 그게 이유가 될는지는 모르겠는데, 프라하의 개들 때문이다. 체코도 여느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내가 보기엔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평균 이상으로 개를 반려동물로 많이 키운다.


백만 남짓의 프라하 도시에 공원이 백 개도 넘어, 프라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개들에게도 환경이 꽤 좋은 셈이다. 대체로 개 주인들은 개를 줄로 묶어 데리고 다니지만, 개중엔 공원에 개들을 풀어놓는 이들도 많았다. 유럽의 반려 견들은 대부분 크다. 송아지만 한 큰 개들이 뛰어다니는데 그런 틈에서 조깅을 하다 괜히 물릴까 싶어서였다. 어렸을 때 개가 무서워 개와 마주치면 도망치듯이 뛰고, 그러면 개가 더 심하게 짖으면서 달려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개 때문에 조깅을 하지 않았던 것은 핑계였다. 프라하의 개들은 ‘견공’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점잖다. 프라하 지하철을 처음 이용하면서 놀랐던 건, 큰 개들이 주인과 함께 지하철을 아무런 문제 없이 타고 다닌다는 점이다. 버스나 트램도 탈 수가 있다. 지하철 안에서 주인은 개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을 보는데, 그 덩치 큰 개들은 짖지도 나대지도 않고 주인 곁에 얌전히 웅크리고 앉아 있다.


지하철에서 뿐만 아니다. 주인이 슈퍼마켓이나 은행 등에 일을 보러 들어갈 때면 그 건물 입구의 설치된 봉에 개를 묶어놓고 들어가는데, 슈퍼마켓의 경우 수많은 이들이 카트를 끌고 그 옆을 스쳐 지나다녀도 주인이 나올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기다린다. 극장이나 식당에서도 개의 입장이 허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즉슨 프라하에는 개 학교가 다수 있고 거기서 철저히 교육을 받는다는데, 사람이나 개나 교육을 잘 받으면 다 그렇게 되나 보다.


프라하에도 역시 노숙자들이 많다. 우리가 생각할 때 노숙자란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든 사람들인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개를 반려동물로 데리고 다닌다. 누구 말에는 적선하는 걸인이 개와 함께 있으면 동정심을 유발해 수입(?)이 더 는다고도 한다. 심지어 체코 당국은 개를 반려동물로 데리고 다니는 노숙자에게는 개를 위한 부양비까지 지원한다고 한다.


체코에서 개들이 이렇게 대접을 받고 사니, 대중교통 수단에서 약자들인 노인네나 유모차를 끄는 엄마들의 경우 역시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노인네들에게 자리 양보하는 풍속은 우리보다 더 몸에 배어 있고, 청년들의 경우 유모차를 끄는 엄마가 승하차할 때는 유모차를 번쩍 안아 들어 중세의 기사가 공주를 에스코트하듯이 돕는다.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명예와 관련이나 되는 듯이.


지하철의 견공들과 은행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견공


인제 우리도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고, 이웃 일본에는 반려동물을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우리가 자라던 옛날,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의 시기와 비교하더라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옛날 대학원 다닐 때 모 학교 국문과 수업에서는 학기가 끝나는 종강 모임에 사제가 함께 근교 계곡으로 나가 물고기 아니 개를 ‘천렵’하는 모임을 가졌다. 마치 국문학 하는 사람이 전통음식 개도 못 먹어서야 되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언젠가는 하도 개고기 타령들을 하기에, 국내에 개고기 공급이 딸려 중국서 늑대 고기를 수입한다는 얘기를 전했더니, 수송, 보관에 문제가 있어 그렇지 야생이라 더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


육식 자체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탓에 개고기는 꺼리지만, 나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를 ‘가족’같이 극진히 여기는 사람들을 보고 코웃음을 치는 부류에 속했다. 우리 학과 여선생님이 자신이 키우던 개가 죽어, 멀리 경기도 용인까지 가서 화장을 시키고 왔다며, “우리 개가 살아생전 고생은 했지만 손석희 아나운서의 애완견이 화장한 곳에 가서 화장을 해 호사를 누렸다.”며 애도에 잠긴 것을 보고 딴 선생과 킥킥대고 웃다가 그 선생에게 들켜 “니들도 사람이냐?” 하는 차가운 시선을 받은 적이 있다.


반려동물이 가족이 되는 것은 합리적 사유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연민의 감정이 낳은 결과일 터, 그때까지만 해도 그걸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한 생명의 슬픔과 고통을 나의 슬픔과 고통으로 느끼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마음을 다른 생명에게로까지 확장해가는 연민과 공감 능력을 말하는 것일진대, 머리로는 그리 생각돼도 이게 몸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어느 동물병원 이름은 “말할 수 없는 존재의 아픔”이라고도 하지 않나?


프라하 얘기는 아니고 그리스 산토리니 섬을 놀러 갔을 때 이야기인데, 하루 종일 두 마리의 개가 우리 부부를 쫓아다닌 적이 있다. 아내는 먹을 것도 주며 귀여워했지만, 나는 쫓아다니는 것도 못마땅했고 우리가 바다를 바라보면 똑같이 멈춰 서서 바다를 쳐다보는 개들의 태도에 기분이 별로였다. 아내 말이 ‘나’라는 인간이 좀 마음이 약해 동정심이 있어 보일 뿐이지, 원래는 그다지 공감 능력이 큰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산토리니.jpg 바다를 바라보는 산토리니의 견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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