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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만난 한국문학 관련 북한 책들

by 양문규

안식년을 체코에서 보내게 된 데는 그때까지 유럽 여행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아내의 의견도 참조가 됐었다. 그럼에도 내 입장에서는 안식년이라고 마냥 책을 놓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체코(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1948년 북한과 공식적 외교관계를 맺는다. 그 후 양 국가 간 학술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북한의 도서들이 체코에 집중적으로 들어왔다. 이왕지사 체코를 간 김에 나는 그곳에 와있는 한국문학 관련 북한 책들을 살펴볼 계획을 세웠다.


체코의 북한 도서들은 국립 도서관에는 없고, 대부분이 내가 방문한 카렐대학교와 동양학 연구소 양쪽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국내에서도 작심하고 찾아보면 구해볼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그게 아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노느니 염불’이라고 여기서 이것저것 들춰 읽다 보게 됐는데 가끔씩 흥미로운 자료들도 발견했다.


1950년대에는 북한 작가들이 체코를 많이 방문했던 듯싶다. 그곳에 소장된 북한 도서들을 보니 프라하를 방문한 북한 작가들의 친필 서명이 담긴 책들이 더러 있었다. 프라하를 방문한 식민지 시기의 대표적 농민소설 작가 이기영이 북한에서 다시 출간한 자신의 대표작 『고향』의 속지에 ‘요세프 슈람 동지 앞’이라는 서명을 해놓았다.


고향과 리병철.jpg 북한에서 재 발간된 <고향>, 이기영의 서명, 이병철의 서명(좌측부터)


남한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시인인 이병철도 북한서 발간한 자신의 시집을 역시 슈람에게 기증하며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도서를 남겼다. 이병철은 해방 직후 활동한 좌익계열 시인이다.


그의 시 「뒷골목이 트일 때까지」는 1946년 대구 10·1 사건에 연루된 자신의 동지들이 미군정의 탄압을 받는 상황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이 시보다는 해방 직후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그의 시 「나막신」 때문에, 그가 아름다운 서정의 시인이었음을 특별히 기억한다.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목숨 ‘壽(수)’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이병철, 「나막신」)


아마도 이 시의 화자는 일제 치하 식민지 당국의 추적으로 몸을 피해야 했던 운동가였으리라. 바로 「나막신」의 그 시인이 월북해서 출간한 시집 『로동의 기쁨』(1956)을 프라하에서 만나게 되니 착잡하면서도 뭉클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월북을 했으나 1953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숙청을 당해 사형을 당하거나 문학의 장에서 사라지게 된 임화, 김남천, 이태준의 운명을 그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1953년 이전에 발간된 북한의 도서에는 이들의 이름이 굉장히 자주 눈에 띄지만 그 이후는 모두 사라진다.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출간된 도서의 그들 이름에 누군가가 빨간 줄을 그어 손상시켜 놓았다. 모르긴 몰라도 당시 나처럼 체코의 카렐 대학을 방문했던 북한 연구자의 소행으로 추측이 된다.


남한에서 다시 편집해 출간됐던 백석의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1957)의 원본이 카렐대학교와 동양학 연구소 양쪽에 다 있었다. 이 책의 원본이 남한에 있다고는 하는데 내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시집이 여기서는 독자들의 손을 거의 타지 않은 채, 표지 장정을 비롯해 책 자체가 방금 출간된 것과 같이 깨끗한 보존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동양학 연구소의 경우 이 책을 도서 분류도 해놓지 않고 방치해놓아 마음만 먹으면 들고 나올 수도 있었지만 끝내 그러지는 못했다.


집게네 형제.jpg 백석의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1957) 표지(좌)와 속표지, 정현웅이 그린 백석의 초상도 있다.


북한의 국립 문학예술서적 출판사에서 출간된 『세계의 분노』(1959)라는 시집이 있어 들춰봤었다. 이 시집에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편들었던 소련, 중국, 동유럽 공산권 국가 시인들의 작품들이 번역돼 실려 있었다.


체코 쪽에서도 몇몇 시인이 참여했는데, 흥미롭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시도 실려 있었다. 시 제목은 「원예사」이다.


이 시의 화자는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지원병으로 참전했으나 현재는 정원을 가꾸는 원예사이다. 그는 석양이 깃든 정원에서 과거 스페인 내전의 참화를 떠올리며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상을 걱정하는 시다. 프랑스로 망명하기 이전 공산 체코 아래 활동했던 쿤데라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정기적으로 도서관에 나가 북한의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소문이 나를 도와주던 체코 학생들의 입을 통해 여기저기 전해졌었나 보다. 어느 날 이미 현역서 은퇴한 카렐대학교 한국학과의 명예교수인 블라디미르 푸체크 교수(1933~)가 그의 자택에서 나를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었다. 푸체크 교수는 1950년 카렐대학교에 한국학과가 설립되고 난 2년 후인 1952년 한국학과를 입학해 1957년 졸업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 휴학하고 1955년부터 1년간 북한에 체류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가 한국전쟁 직후 함경도 청진에 설립한 적십자 병원 행정부서의 통역원으로 일했다. 그는 졸업 이후에도 다시 평양으로 가서 체코 정부의 해외기관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1966년 완전히 귀국한 후 카렐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로 근무하다 퇴직했다. 그의 집에는 그가 북한에 체류하면서 개인적으로 소장하게 된 북한 도서들과 기타 흥미로운 자료들이 꽤 있었다.


푸체크 교수는 당시 자신의 지병인 심장병이 도지고 있던 터라, 더는 그 작업을 미룰 수 없다 판단해서인지, 자신이 소장한 북한 도서 자료들을 목록으로 정리해놓고 있었다. 개중 잘 모르는 한자들이 나오면 나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고자 했다. 또 나를 만나보고자 한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이 책들을 기증할 남한의 도서관 등을 물색해보기 위해서다.


나는 당장 우리 학교 도서관에 그걸 갖다 놓고 싶었는데, 문제는 국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그 제반 절차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사정을 푸체크 교수에게 얘기했더니 그는 그냥 이 도서들을 카렐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러면서 나 보고는 혹시 자기가 소장한 책들 중 꼭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져가라 해서 욕심으론 다 가져오고 싶었지만 그중 일부를 가져오면서 그에게 약간의 사례를 했다. 엎드리면 코 닿을 곳인 북한에 있는 도서들을 이역만리 체코에서 어렵게 만나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되니, 한반도 역사의 운명이라는 것이 참 기구하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한번 하게 됐다.


김일성과 푸체크.jpg 푸체크 교수 자택서(좌), 1984년 김일성(우측 위부터 네 번째)의 체코 방문 시 기차에 합석한 푸체크 교수(좌측 위부터 두 번째)


체코가 소장한 1950~70년대 북한의 도서들은, 김일성대학과 과학연구원 등 북한의 권위 있는 학술기관이 정리해서 보낸 것들이기에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에 비해, 현재 체코 도서관이 소장한 남한의 도서들은 몇몇 남한의 대기업들이 중구난방으로 기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돈만 있다고 좋은 책을 보낼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동양학연구소.jpg 동양학 연구소의 북한 책 서가, 잡지, 50년대 로동신문, 화보 자료( 좌측 상부터 시계방향으로)


또 한편으론 체코 정부의 재정이 열악하다 보니,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북한이나 남한에서 온 도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장 동양학 연구소의 한국학 도서실에는 사서 하나 제대로 두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구소와 학교.jpg 동양학 연구소 한국학 도서실 현판(좌), 카렐대학교 도서실 안에서 본 프라하 시내의 바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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