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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멘 여행은 왜 갔다 왔냐고요?

by 양문규

프라하에서 안식년을 지낼 때 가끔씩 한국에 있는 매제와 전화 연락을 했었다. 매제는 한때 독일 시민권도 갖고 있었고 독일서 오랫동안 살았던 이다. 한 번은 전화로 독일 브레멘을 갔다 왔다고 하니, 매제 왈, 아니 거기 뭐 볼 게 있어서 갔다 왔냐고 물었다. 그 말도 맞는 게, 브레멘은 갈려고 해서 간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유럽서 여행할 때 ‘스카이스캐너’라는 사이트를 이용해 여행 계획을 세우곤 했다. 그 사이트에 여행 출발지와 목적지를 입력하면, 적절한 여행 코스와 값싼 항공편, 숙소 등을 알려준다.


브레멘은 유럽 남서쪽을 여행하다가 다시 프라하로 돌아오는 비행 편을 검색하던 중 알게 된 환승 공항이었다. 우리는 떡본 김에 굿한다고 브레멘 공항에서 환승을 할 뿐 아니라, 아예 그곳을 구경도 하고 오자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유럽의 항공 산업은, 탈규제화의 바람이 불면서 저가항공의 시장 진입과 노선 개척이 활성화된다. 이에 호응해 유럽의 지방정부와 도시들도 앞 다퉈 관광산업을 일으키겠다며 저가항공사에 각종 혜택을 주고 이들을 유치하면서 유럽 안에서의 비행기 여행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해진다.


저가항공 노선의 확대로 중소도시의 공항들도 활성화되는데, 내가 이용해본 독일의 브레멘, 노르웨이의 베르겐, 폴란드의 그단스크 공항들이 그러한 예다.


그런데 이 도시들은 이미 오래 전인 중세 유럽 시기부터 ‘한자동맹’에 속해 있던 항구도시들로 유럽이 대서양으로 진출하기 이전에는 유럽 내륙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이런 연유로 현재 유럽 내 항공노선에서도 이들은 중요한 허브공항 역할을 해, 나 같은 관광객도 이런 곳을 환승했다 가면서 여행할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시청 거리와 마켓 광장.jpg 시청사가 있는 거리(상), 마켓 광장


브레멘 역시, 시내의 중심인 마르크트(마켓) 광장으로 나가니, 한자동맹에 속했던 도시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광장 한편으론 시청사와 성 페트리 대성당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이 두 건물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자치도시인 브레멘 시민의 자존심을 보여주듯 웅장하고 화려했다.


길드는 아니지만 1537년 지어진 독일 전통식의 상공회의소 건물이 있고, 마켓 광장 주변으로는 한자동맹 도시들에서 흔히 보는 모양의 파사드와 박공지붕의 건물이 즐비하다.


시청사 앞에는 한자동맹 도시들을 지켜주던 수호 기사인 롤란드 동상이 우뚝 서있다. 이는 역시 한자 도시였던 라트비아 리가의 ‘검은 머리 전당’이라는 길드 건물 앞에서도 봤던 적이 있다.


성당과 로란트 동사.jpg 성 페트리 성당(좌), 롤란드 동상


마켓 광장에서 베저 강 쪽으로 향해 가면 서울 인사동 거리와 비슷하게 각종 공예품 가게와 갤러리가 모여 있는 뵈트허 거리를 만난다. 좁은 골목에 붉은색 벽돌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데 이 역시 한자 도시였던 그단스크의 골목과 비슷한 분위기다. 이곳에는 브레멘 상인들의 클럽으로 세워졌던 ‘로빈슨 크루소’라는 이름의 건물도 있었다.


로빈슨 크루소!? 그렇다 데포우의 해양 모험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주인공 인물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소설 속 로빈슨 크루소의 아버지가 바로 이 브레멘 도시 출신의 상인이다.


부르주아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떠나 자연과 대결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습이 마치 근대 유럽 문명의 대표선수를 연상하기에, 브레멘 도시는 그를 자신들의 도시 이미지에 맞는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뵈트허 거리.jpg 뵈트허 거리, 종탑, 로빈슨 크루소 건물 입구의 퓨마 동상, 공예품 가게(좌측 위부터 시계 방향)


이렇게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브레멘 시립 도서관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나는 여행을 하다가 도서관만 있으면 자석에 쇠붙이 끌려가듯이 들어가 본다. 물론 책이 있어 끌려가기도 하지만 배고픈 점심때가 돼 들어가면 구내에는 어김없이 싼 가격의 스낵바나 비스트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그곳에서 맛은 별로였으나 단돈 4유로에 빵과 야채샐러드를 곁들인 연어 수프를 사 먹고 기운을 차렸다.


브레멘 도시가 애초부터 생소하지 않았던 건, ‘브레멘 음악대’라는 동화 때문이다. 브레멘 거리 도처에 브레멘 음악대 동상이 서있는데, 도서관 안에도 건물 층층이 음악대 동상이 있었다. 음악대 동물들은 도서관 아니랄까 봐 모두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브레멘 음악대는 유명한 동화 이야기이긴 하지만, 독일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 하필 왜 브레멘이라는 도시의 음악대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노동’의 관점에서 본 그림 동화」(최서희)라는 논문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음악대와 도서관.jpg 브레멘 음악대 동상(좌), 브레멘 시립 도서관


늙어서 제 할 일을 못 한다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네 마리의 동물(조랑말, 개, 고양이, 닭)은 그들이 살던 시골을 떠나 브레멘 도시로 간다.


이들 네 명은 그동안 주인의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의미 없는 노동을 해왔지만, 이들이 시골을 탈출해 브레멘으로 가는 건 노동을 통해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네 명의 동물들로 구성된 브레멘의 음악대는 하나의 노동공동체로 움직인다.


가령 이 동물들은 도적의 집을 만나자 그들을 축출하기 위한 방법을 ‘상의’한다. 이 과정은 바로 자유를 획득한 부르주아 경제인들이 상호 협조하며 탄생하는 과정을 그린다.


서로의 등위에 올라선 동물들은 하나의 운명공동체이며 등 위에 올라서 있는 건 상대를 신뢰함을 의미한다. 이들 네 명은 각자 고유의 목소리를 통해 합창을 하며 이 합창은 일치된 방법, 각 주체의 통합된 의지이다.


도적의 집으로 들어가는 동물들의 방법은 조직화되고 합리적인 기업의 시스템을 보여준다. 이들의 이야기는 바로 독일 최초의 자치 도시국가 브레멘의 창립과 나아가 기업의 창립을 상징한다.


중세시대 하층민이 무자비한 봉건 영주로부터 자유를 찾아 도시로 떠나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자유도시인의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는 희망을 담은 민담인 것이다.


도서관 실내.jpg 도서관 실내의 음악대 동상과 도서관 구내에서 먹은 연어 수프


매제에게 이런 걸 알고 싶어 브레멘을 갔다 왔다고 얘기하는 건 뻥을 치는 것이기에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곳을 가도 앎의 세계란 한도 끝도 없는 것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여행에서 한 가지 한 가지 이런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은 즐거운 일이다.


‘무소유’의 스님 법정은 다 알다시피 살아생전 많은 베스트셀러들을 출간했다.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인세로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인세로 들어온 수입의 대부분은 사찰에 기부하고 나머지는 오롯이 개인적인 여행을 하는데 썼다고 한다.


법정 스님이, 나처럼 피상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 여행을 했던 건 아닐 터고, 그러나 여행이 일종의 수행처럼 궁극적 앎을 깨닫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봤다. 왜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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