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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길

by 양문규

2013년 해외로 가족이 함께 자유여행을 떠나게 됐다. 첫 자유여행 치고는 난이도가 다소 높은 러시아로 여행지를 정하게 됐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러시아 특히 모스크바에서는 엉터리로나마 영어가 잘 통하지를 않는다. 더욱이 영어로 된 안내문은 전무하고 모든 것이 러시안 알파벳으로 표기돼 그것이 어떻게 발음되는지 정도는 알고 가라는 얘기도 들었다.


요즘 같은 글로벌 한 세상에 그럴 리야 있겠냐고 의심하면서도, 그쪽 알파벳을 대충 익히고 갔는데 진짜 그게 약으로 쓰일 줄이야! 지하철을 급히 타고 내려야 할 때 얼른 다음 역 지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숙소 역시 아예 맘 편하게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민박을 정해놓고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는 모스크바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밤 상트페테르부르크(이하 ‘상트’)로 이동해야 했다. 상트에서 핀란드와 발트 삼국, 그리고 벨라루스를 거쳐 모스크바로 되돌아와 이곳을 다시 관광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상트까지는 야간열차를 이용해 가며 하루를 벌 생각이었는데, 기차표는 아침 일찍 사놓아야 된다 생각했다.


민박집주인은, 6월 말 7월 초 백야 시즌에 관광객들이 얼마나 많은데 차표 예매도 하지 않았냐면서, 자기네한테 커미션을 주고 미리 부탁을 하지 않은 무계획함(?)을 한심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비웃듯이 재주껏 알아서 표를 구해보라고 했다.


우리는 설마 하며 표를 사기 위해 역을 찾았다. 일단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이 없다. 러시아의 역 이름은 종착지 지명을 역의 이름으로 한다. 레닌그라드(상트의 옛 이름) 역은 모스크바에 있어도 종착지가 레닌그라드이기 때문에 역 이름이 레닌그라드 역이다.


그래서 모스크바에는 이렇게 레닌그라드 역 말고, 카잔 역, 벨라루스 역, 키예프 역 등 종착지의 명칭을 따르는 9개의 역이 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한다면 서울역에 가면 부산역, 용산에 가면 목포역, 청량리에 가면 강릉역이 있는 셈이다.


국립(레닌) 도서관 앞의 도스토예프스키 동상(좌), 관공서 건물 같은 모스크바 대학


레닌그라드 역은 지하철 노선도를 갖고 찾아갔다. 한국어와 영어로 된 지하철 노선도는 모스크바에 있는 한국의 롯데 호텔 로비에나 가야 구할 수 있다고 해서 일부러 그곳을 찾았다. 그것도 민박집주인이 아니라 밥을 해주는 조선족 아줌마가 전해준 귀중한 정보였다. 문제는 레닌그라드 역에 도착하면서부터 발생했다.


일단 “KACCA”라고 적힌 곳이 매표소인지를 몰라 한참을 헤맸다. 제복 차림의 직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영어가 전혀 안 됐다. 매표창구의 직원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어를 몇 달 공부한 딸이 간신히 몇 마디 문장을 만들어 물어보면 속사포같이 러시아어로 응대하는데 이건 완전 요령부득이다. 눈치를 가만히 보니 민박집주인이 예상한 대로 표는 다 매진된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계속 영어로 질문을 하니, 얼굴이 벌겋고 둥둥한 러시아 아가씨는 화가 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잘 분간이 안 되는 표정으로, 분명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 텐데 그냥 자기 말만 계속 해댔다. 대체로 러시아 사람들 얼굴은 무표정한 편이고 그것이 때로는 무서운 인상을 주기도 했다.


아내나 애들 모두 속수무책으로 있는데, 나는 역 구내를 돌아다니면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를 물색해보았다. 이윽고 <카라마조프가 형제>의 막내아들 알료샤 같이 착하고 준수하게 생긴 대학생 청년 하나를 발견했다. 아니나 다를까 알렉산더라는 이름의 그 청년은 영어를 잘할 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친절했다. 그는 매표원 아가씨와 우리 가족 사이에 껴서 한참을 중계하며 결국 표를 구해줄 수 있었다.


상트로 가는 기차표는 매진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예정한 시각에서 두 시간 늦게 러시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부동항구인 무르만스크로 가는 기차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기차는 상트의 모스크바 역(역시 상트에는 상트라는 이름의 역이 없다.)으로 가지는 않지만, 상트 교외에 위치한 라도시스키라는 역을 둘러서 가니 거기서 하차하면 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청년의 친절한 안내로 원래 4인 기준 40만 원의 표를 45만 원에 크게 손해를 보지 않고 구할 수 있었다. 그 청년은 표를 다 구입하고서도 안심이 안 됐는지 우리를 다음날 새벽에 출발하는 무르만스크행 기차를 타는 플랫폼까지 일부러 데리고 가서 그 장소를 몇 번이나 확인시켜 줬다.


아! 이 천사 같은 청년! 나는 고마운 나머지 이 청년에게 12년 후 모스크바로 다시 돌아올 터이니 만날 수 있으면 또 만나자고 했는데, 애들이 12일을 12년이라 했다고 엄청 깔깔대며 웃었다.


북구의 베네치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저녁을 먹자마자 일찌감치 다시 레닌그라드 역으로 갔다. 대합실의 빈 의자는 하나도 없고 한낮처럼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러시아는 야간열차가 생활 속에 일상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열차는 새벽 1시에 출발했는데 난생처음으로 컴파트먼트 형식의 4인 침대칸(쿠페)을 탔다. 급하게 구한 표라 가족이 함께 있을 수는 없었고 나는 아들과 함께 다른 칸의 위층 침대를 사용했다. 침대 아래층의 두 칸은 러시아 남녀가 사용했는데 그들은 남남이었다.


기차가 출발하니 나와 대각선 위치에 누운 뚱뚱한 러시아 여자는 상의를 훌렁 벗어젖히고 내복 차림으로 드러누웠다. 위 칸에서 내려다보니 러시아 여인 특유의 큰 가슴이 내 눈으로 꽉 차 들어왔다. 가끔씩 그쪽으로 시선을 흘깃흘깃 보냈는데 그 여인이 날 노려보고 있어 기겁을 했다. 실은 노려본 게 아니라 눈을 뜨고 자는 여인이었다.


상트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700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당시 러시아는 백야의 계절이라 밤이 워낙 짧아 순식간에 상트로 이동해간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러시아에서는 사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잠이 든 적이 거의 없었다. 어쨌든 새벽 1시에 떠난 기차는 아침 9시가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상트로 가면서 이토록 영어를 쓰지 않고 자기네 말을 고집하며 쓰는 나라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우리 애들은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냐면서 러시아에 대하여 엄청 볼멘소리를 해댔다. 물론 상트는 모스크바에 비해서는 영어가 상대적으로 많이 통용되기는 했다.


러시아가 영어에 배타적이고 자국어를 고집하는 것은 미국과 맞서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시절의 향수 같은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러시아 대륙 자체가 지닌 풍부한 역사와 문화적 경험, 문화적 아이덴티티는 이러한 자국어에 대한 고집 내지는 자긍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기 영토 안에서는 여러 소수민족의 언어를 억압하면서 이들을 모두 러시아어라는 단일 언어로 통합하려는 러시아 중심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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