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를 단체로 가서 관람한 게,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맨날 왕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홍콩 무협 영화 ‘외팔이 검객’ 시리즈 따위를 보다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일종의 ‘문화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뮤지컬 음악 자체가 갖는 발랄한 선율도 그렇지만, 해맑고 귀티가 나는 소년과 소녀들이 등장하는 유럽의 가정, 아름다운 정원과 저택,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침대와 식탁이 있고 심지어 집안에서 인형극까지 하는 장면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고 온 다음날 아침, 마당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수채에서 밤새 사용한 요강을 부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 너무나 비루하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 요강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엎어진 적도 있었다.
그날 학교를 가니 음악 선생님도 아니고 생물 선생님이 칠판에 감미로운 ‘에델바이스’의 영어 가사를 써주고 노래를 가르쳐 줘 전날의 흥분과 감동에 다시 한번 더 젖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에델바이스!’ 당시 수학여행을 설악산으로 많이들 갔는데, 그곳에 자생하는 솜다리 꽃이라나, 에델바이스 비슷한 모양의 꽃을 말려 작은 액자 속에 넣어 에델바이스라고 팔았다. 여학생들은 이를 여행 기념 선물로 많이 사 오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내 친구는 여자 친구에게 그 에델바이스 선물을 받았는데, 그 아버지가 친구의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졌다고 애꿎은 그 액자를 마당에 내팽개쳐 산산조각이 나는 불상사도 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노래들은 예순을 진즉에 넘은 이 나이에 들어도 여전히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그 영화가 주는 감동이 그때와 같을 리는 만무하다. 그 영화의 내용은 현실이 아닌 가상이고 환상이며 설사 현실적인 면이 있을지라도 상당히 낭만화 또는 이상화돼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2.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가 태어난 고향이고, 그가 수도 비인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활발히 음악활동을 했던 곳이다. 여행할 당시 모차르트의 흔적들을 쫓아다니느라 모든 정신이 그에 다 쏠려 있어서, 이곳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몇몇 장면이 촬영됐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고 다녔다.
물론 잘츠부르크 성을 구경할 때 그 안에 인형 박물관인가가 있었는데, 그 입구에 사운드 오브 뮤직을 인형극화 한 안내 사진이 있는 걸 보긴 했으나 그냥 무심히 지나갔다.
여행에 돌아와서 다른 사람의 여행 후기를 읽다가 비로소 잘츠부르크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고, 찍어놓은 사진을 정리하면서 그곳을 다녀오긴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차르트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 내가 이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다닌 것은 설사 그곳에 갔어도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임을 알려주는 어떤 표지나 안내판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어딘가 구석에 안내문이 있었을 법도 하지만 적어도 이를 내세워 그곳의 경관을 방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3.
내가 사는 강릉 경포 호숫가 둘레를 산책하다 보면 호숫가 주위로 심어진 한 소나무 밑에 “보고 또 보고”라는 표지석이 있다. “보고 또 보고”는 한때 TV에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신혼여행 와서 이곳 소나무 밑에서 연기를 하는 장면이 있었나 보다. 마침 그 주인공이 극 중에서 검사 신분이었는데 강릉 검찰 지청장이 이곳에서 드라마 촬영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주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드라마가 당시는 인기였고 그래서 그때는 이 표지석이 간혹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저게 뭔 코미디 같은 장면인가 싶기도 하고 제발 좀 없애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매번 든다.
강릉 인근 정동진 해변에도 왕년의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의 ‘고현정’ 소나무가 있다. 비록 쓸쓸했을지언정 동해 바다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던 해송이, 지금은 자신의 주위에 울타리를 친 채 고현정의 포로로 붙들려 있는 형국이다.
인근에 설치된 세계 최대 크기의 모래시계 시설은, 고기잡이 배 몇 척을 부리던 고적함이 그 진정한 매력이었던 작은 마을 정동진의 맛을 다 앗아가 버렸다.
잘츠부르크의 미라벨 궁전과 헬브룬 궁전은, 나 같은 관광객에겐 그곳이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게 했지만, 어줍지 않은 기념물로 그 궁전의 정원과 주위의 자연경관을 깨뜨려 놓지 않은 건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런 유치한 짓을 하지 않은 건,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를 탄생시킨 잘츠부르크의 문화적 저력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