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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덴호수 마이나우 섬에서독일 민족을 또다시생각하다

by 양문규

여행을 했던 유럽의 국가들 중 또다시 가보고 싶은 나라를 꼽으라면 서슴지 않고 독일을 들겠다. 독일은 주지하다시피 서양 고전음악의 고향일 뿐 아니라 문학, 철학 등 유럽 인문학의 고향이다. 그런데 그것이 독일을 다시 가보고 싶은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그 말고도 독일은 유럽 국가 중 가장 자연과 더불어 휴식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독일을 갔던 건, 2년 전 원래 독일이 아니라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스위스와 국경을 접한 프랑스 북동부와 독일 남서부를 지나가면 서다. 프랑스의 어깨 부분에 해당하는 알자스 지방은 역시 예뻤고, 이와 비교해서 슈바르츠발트의 남쪽 독일은 깨끗하고 정연했다. 스위스도 깨끗한 나라이지만 독일만큼 깨끗하거나 정연하지는 않았다.


독일이 깨끗하다는 인상을 주는 건, 농촌이나 도시 제반이 잘 정돈돼있기도 하거니와, 어디를 가든 아주 높은 산들은 아니지만 숲이 울창하고 그러한 숲이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스위스에서 남부 독일로 넘어가면 콘스탄츠라는 도시와 만나게 된다. 콘스탄츠는 영세중립국가인 스위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을 용케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이나우 정원.jpg 마이나우 섬의 사보텐 정원과 장미 정원


우리가 콘스탄츠 안에서도 우정 찾아간 관광지는 이 도시를 끼고 있는 보덴 호수 안에 자리 잡은 꽃들의 섬 마이나우다. 마이나우 섬은 캐나다의 부차트 가든 같이 엄청나게 큰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스위스에서 웅장한 자연이란 자연은 다 보고 다녔음에도 나는 오히려 이 마이나우에서 진정한 평화와 휴식을 느꼈다.


이곳에도 영국식 정원, 이태리 또는 지중해식 정원, 프랑스 정원 등 여러 유형의 정원들이 조성돼있는데, 정작 독일식 정원은 없다. 물론 독일식 정원이라 이를 수 있는 게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굳이 이른다면 검박한 느낌의 정원이라고나 할까?


계단식 정원.jpg 이탈리아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의 정원을 흉내 낸 듯싶은 계단식 분수대 정원


마이나우 섬을 둘러싼 보덴 호숫가 주위의 버드나무는 자연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데, 가벼운 바람이 일면 잠시 솟았다가 다시 호수에 고꾸라져 박히고 그 사이로 오리들이 유유히 지나간다. 호수 둘레로는 눈썹 높이로 호수 수면이 보이는 울타리에 올려놓은 꽃 화분이 그나마 독일 친구들이 부리고자 한 멋이라고나 할까 싶다.


보덴 호수 근처 마을에 숙소를 잡았을 때도, 숙소 인근에는 꽃을 온실에서 키워 파는 꽃가게가 있었고, 숙소에서 건너 보이는 집들 지붕 위로는 고양이들이 유유자적이 노닐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남부 독일 하면 평화와 휴식이 떠오른다.


보덴.jpg 보덴 호숫가의 꽃 화분과 벤치


독일은 숲이 울창하여 어떻게 보면 자연의 축복을 받은 땅이다. 당장 이웃나라 프랑스를 보더라도 초원이 있을 뿐 숲이 그렇게 무성하지는 않다. 숲이 많고 산림이 풍부하다 보니 독일 어느 숙소를 가도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목재들을 사용해 건물을 지어 이 나라가 산림부국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일 그림형제의 동화에는 숲이 동화의 무대로 자주 등장한다. 당장 <헨젤과 그레텔>도 애들이 깊은 숲 속에 버려지고, 또 애들은 미로의 숲길에 떨어뜨려 놓은 돌멩이를 좇아 집을 찾아오지도 않는가!


그림동화는 독일이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처음 출간되고 그 이후부터 독일 국민의 사랑을 본격적으로 받는다. 그림의 동화 이야기들이 독일 민담과 전설의 보고인 독일의 울창한 숲을 무대로 삼고 있어, 이것이 독일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일면도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독일의 숲, 산림 등 평화와 휴식을 주는 아름다운 자연이, 한때 나치에게 독일 민족의 우월함과 신성함을 상징하는 매개물로 사용된다.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는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나치는 그 자연에다 “피와 대지”라는 구호를 내건다. 그리고 나치의 문학은 독일의 흙과 자연을 극도로 예찬한다.


나치는 도시의 문학을 ‘아스팔트 문학’이라 부르면서 이를 비독일적인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도시는 독일 문화를 잠식하는 바이러스가 우글거리는 타락한 장소인데 반해, 산림과 숲 등 독일의 향토는 독일 민족의 부모이자 고향이고 진정한 조국으로 치부한다. 나치는 자연에서 갖는 감수성을 파시즘의 잔인성과 결합시키고 있는 셈이다.


한때 독재자 박정희도 ‘새마을 문학’을 들먹이지 않았던가! 나는 독일을 여행할 때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그리고 위대한 문화 전통을 가진 독일 민족이 어떻게 20세기 들어 그러한 야만의 정치에 굴복하고 이용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독일의 대문호 토마스 만은 자신의 대표작 <마(魔)의 산>을 패러디해 독일 민족을 “마(魔)의 민족”이라고 비난했다. 종교개혁가 루터를 대표적 예로 들어 그는 순수한 ‘독일주의자’로서 반(反) 로마, 반(反) 유럽적인 사상가였는데, 독일인들은 본질에 있어서 세계주의자인 괴테보다는 늘 이 루터 쪽에 가까웠다며 그들은 언제든 자민족주의로 빠질 위험성을 가졌다고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토마스 만의 말이 금과옥조 일리는 없고, 단지 어떤 민족이든 우수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그 이면에는 약점이 있는 것으로, 우리는 민족성을 생래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중국 민족이 어떻고 일본 민족이 어떻고 한국 민족이 어떻고 하는 따위의 단정적 언사는 늘 주의해서 써야 할 말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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