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의 근대 또는 근대문학은 1894년 갑오개혁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갑오경장에서 청으로부터의 자주권이 선언되고 신분제도의 철폐 등이 이뤄지며, 이 개혁 이후 새로운 근대적 계몽운동 또는 문화운동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 유길준의 <서유견문> 같은 책이 발간된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동학전쟁의 틈을 타 한반도로 진주한 일본이 사주하여 개화파가 벌인 일종의 쿠데타로 폄하되기도 한다. 즉 갑오개혁은 주체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이것이 1910년 우리가 식민지로 추락하는 것으로 귀결되니 이를 우리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북한은 근대가 갑오개혁서 시작된다는 주장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본다. 그 대신 1866년과 1871년에 있었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근대의 출발점으로 보는 다소 희한한 주장을 한다. 이 두 양요는 프랑스와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고 우리가 이에 결사적으로 항전한 사건이다. 이게 근대사의 시작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북한은 19세기 후반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질서로 편입된다고 본다. 단 한국의 근대가 서구의 근대와 다른 것은,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등과 같이 외세의 침략과 함께 시작된다는 점이며, 따라서 한국의 근대 역사는 외세(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해방투쟁의 역사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생각은 중국에서 1840년대의 아편전쟁을 중국 근대사의 시점으로 보는 견해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는 일면 수긍이 가는 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동의하기는 쉽지가 않다. 단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유린하고 문화재를 약탈해간 사실에서 자본주의 열강의 횡포에 울분은 느낀다.
2.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로 들어왔던 프랑스 장교는 미개국이라 생각했던 조선에 아무리 가난한 집에도 책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도 하고 자존심도 상해했다고 한다. 프랑스가 조선군대의 맹렬한 항전에 철수를 하면서 당시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던 많은 책들을 약탈하고 건물을 방화해 소실시켰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약탈해간 책의 반환을 둘러싸고 오랜 기간 벌였던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줄다리기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프랑스는 한국의 열악한 기록 보관 문화를 탓하면서 차라리 프랑스가 보관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냐고 주장한다. 글쎄 프랑스가 아니었으면 일본이 가져갔을 수도 있고 과연 한국전쟁 때 무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럼에도 인류 유산을 독점하고 보관할 자격이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프랑스가 꼴불견이다. 2019년 4월 프랑스의 자랑 노트르담 성당이 화재로 불타버린 사건을 보면, 프랑스가 다른 나라보다 문화재를 더 잘 관리할 수 있다는 논리가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3.
나는 런던을 여행하면서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을 두 번 두를 기회가 있었다. 처음 갈 때 이 박물관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 그 수많은 훌륭한 소장품을 보는데 입장료가 무료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무료가 다 사연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이 박물관의 소장품들의 대부분이 영국이 세계 각국에서 약탈하다시피 가져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무료입장은 국제적 여론도 의식하고 일종의 그들의 속죄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대신 이 박물관을 구경하려고 런던을 찾는 관광객이 뿌리는 돈은 얼마나 많을까!
박물관을 들어서자마자 1층 초입에 있는 이집트, 그리스, 근동의 유물들을 보면서 내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관 채 가져온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한 수많은 미라들, 파르테논 신전을 올라가서 떼 온 수많은 장식 조각들, 아시리아 왕궁의 입구를 지켰던 인간 사자상과 궁전 벽의 부조 – 어떻게 저리도 통째로 노골적으로 떼어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관인 게 가슴에 구멍이 뚫린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석상이다. 람세스 2세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모세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이로, 나중에 이집트(애급)를 탈출하는 모세를 추격했던 바로 그 이다. 그는 “이집트의 루이 14세”라고도 불리는데 이집트가 최고의 전성기를 이뤘던 시대의 임금이었다.
람세스 2세 시대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 신전과 건축물들이 세워지는데 그는 자신의 석상 역시 여러 곳에 세웠다. 근세에 들어 유럽의 국가들은 이 이집트의 유물들을 탐내기 시작하는데 프랑스와 영국이 이에 경쟁적으로 참여한다.
나폴레옹은 심지어 이집트 원정까지 했는데, 7.5 톤 무게의 람세스 2세 석상은 원래 프랑스가 자국으로 가져오기 위해 가슴에 구멍까지 뚫어 놓았으나 결국 운반에 실패했다. 이를 영국이 수 백 명을 동원해 사막을 가로질러서 다시 가져온 것이다.
‘웃픈’ 이야기로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인 람세스 1세의 석상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이집트의 절대군주였던 이들 부자가 자신들의 석상이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영국과 프랑스에 각각 따로 놓여 있으리라는 생각은 그들 살아생전엔 차마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4.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문학사 강의를 시작할 때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 지점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얘기해준다. 그중 북한의 주장도 소개하는데 그 주장의 논리가 얼마나 적합한지를 떠나, 한국의 근대가 서구와 달리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주장도 한 번쯤은 귀 기울여준다. 그러면서 양념 삼아 자본주의 서구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약탈해온 문화재들에 대한 얘기도 반드시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