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라하에서 저가항공을 이용해 도착한 로마의 공항은 참피노 공항이다. 다시 스페인으로 갈 때는 국제공항인 파우미치노 공항을 이용했는데 이 공항의 다른 이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이다.
다빈치 공항 이름이 어떤 사연으로 결정됐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태리 사람들은 다빈치가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와 비교해서 더 윗길로 가는 예술가로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쨌든 나라의 관문인 국제공항의 이름을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정한 것을 보면 이탈리아가 역시 위대한 예술가들의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공항서 버스를 타고 로마 시내로 들어올 때 그 종점은 중앙역인 ‘테르미니’ 역 앞이었다. 아내는 ‘테르미니’의 철자가 ‘터미널’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어떻게 역 이름을 ‘터미널’로 정했는지 흥미롭다는 듯이 얘기를 했다.
나는 테르미니는 라틴어로 ‘목욕탕’의 뜻이 있는데, 고대 로마 시절 이 부근이 공중목욕탕 지구라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했으면 좋았는데 참 무식하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아내가 엄청 자존심 상해했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바로 이 테르미니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가 있는 콜로세움 경기장의 바로 한 정거장 앞인 카부르 역에서 하차했다. 카부르(Cavour)! 이 역시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지 싶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는 통일된 민족국가로 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19세기 들어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의 지배를 받아 나라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이 시기 50년에 걸쳐 이탈리아는 강력한 통일운동을 전개하여 1870년 통일을 이루게 되는데 이때 중심 역할을 한 세 사람이 마치니, 가리발디, 그리고 이 카부르다.
나는 이 세 사람의 이름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인 가리발디의 위인전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초등학교 꼬마가 이역만리 이태리의 근대 시기 통일과 관련된 위인전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이들 이야기가 아주 오래 전인 개화기 당시에 이미 책으로 발간돼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
<이태리 건국 삼걸전>(1907, 이하 <삼걸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원래 중국의 개화사상가 량치차오가 1902년 저술한 것인데, 신채호가 이를 번역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의 서문을,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이 썼다. 장지연은 이태리와 우리나라는 그 건국 연대도 비슷하거니와 땅의 형세도 닮았고 백성의 숫자도 우리와 큰 차이가 없다고 얘기를 시작한다.
물론 장지연이 다빈치 같은 예술가의 이름을 올릴 리는 없고, 대신 근세 이태리와 현금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비교하면서, 이태리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교황의 지배하에 분열된 국가로 있었으나 근자에 통일국가를 이루게 됐음을 얘기한다. 반면 우리는 열강의 각축 속에 나라가 망할 위기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강조한다.
망국을 목전에 둔 조선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태리 통일을 성취한 세 명의 애국적 행적을 소개하여 이로부터 교훈과 지혜를 얻고자 이 작품을 번역 출간한다는 것이다. <삼걸전> 말고도 같은 시기에 <서사건국지>, <애국부인전> 등의 전기역사물들이 번역되는데 전자는 오스트리아에 대항해 서사(스위스)의 독립운동을 이끈 민간 영웅 윌리엄 텔, 후자는 100년 전쟁 당시 프랑스 조국을 구한 잔 다르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삼걸전>은, 제목과 같이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태리 통일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통일의 방식으로 혁명적 방식을 주장했던 선비 출신의 마치니, 뱃사람의 아들로 군사적 방식을 주장했던 가리발디, 귀족 출신으로 온건한 외교적 방식을 주장했던 카부르를 중심으로 이들이 서로 어떻게 갈등하고 조정하는 가운데 이태리 통일을 이뤄나가게 되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서문에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마치니는 나라 없는 백성임을 분통하게 여겨 항상 검은 상복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일본 통치하에서는 절대로 호적을 만들지 않고 살겠다고 한 한용운이기에 그런 마치니가 마음에 쏙 들었을 것이다.
세 명의 걸출한 위인들로 나라의 독립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개화기 지식인들의 소위 ‘영웅주의’ 사관이 소박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당시 우리의 상황이 절박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오죽하면 신채호는 <삼걸전>을 번역한 직후 이태리 삼걸과 같은 삼걸이 우리 역사 속에도 있었다면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중을 애국의 길로 이끈 국가적 영웅의 전기소설로, <이순신전>(1907)<을지문덕>(1908), <최도통전>(1909)의 세 편을 창작한다. 여기서 ‘최도통’은 명나라를 치러 요동으로 출정한 최영 장군을 이른다.
3.
이태리와 한국이 동일하게 반도 국가이고, 사람들 기질도 비슷하다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를 떠나 개화기에 출간된 <삼걸전>을 보면, 당시 지식인들이 그 이역만리에 있는 이탈리아의 근세 상황을 톺아보며 우리의 상황과 비견코자 하고 있어 이태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멀고도 가까운 이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