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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Oct 03. 2021

나혜석과 함께 하는 스페인 기행

1.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일 뿐 아니라, <경희>(1918)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을 쓰기도 했다. 나는 나혜석 소설이 보여주는 여성해방 의식도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같은 시기 근대소설을 개척한 남성 작가 가령 이광수나 김동인 등과 비교해볼 때 그녀의 문학이 보여주는 진솔하고 생동감 있는 문체를 더욱 사랑한다.  


그녀는 1920년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인 25세에 총독부 관리 김우영과 결혼을 한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선전(조선 미술전람회)에 수차례 입선을 하고 문필 생활을 병행하는 등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나름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간다. 특히 1927년 남편이 연수 차 조선을 떠나 베를린으로 가게 됐을 때 그녀도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가면서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세계 여행을 하게 된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데 그중에는 스페인도 있었다. 그녀가 스페인 여행에 관해 많은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역시 그러한 기행문에서도 그녀의 강한 개성을 엿볼 수 있다. 나의 스페인 여행과는 거의 한 세기의 차이를 두고 있지만 나혜석과 함께 그 여행길에 나서 보고자 한다.       


2.

 나의 경우, 스페인의 남부인 세비야 공항으로 들어와 안달루시아 지방을 구경하고 그 북쪽인 톨레도와 마드리드로 올라왔다. 그러나 파리에 있던 나혜석은 기차를 타고 파리를 떠나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지나 산 세바스찬을 둘러 마드리드로 갔다. 


나혜석은 우선 스페인의 열정적 여인들과 원시적 풍광을 인상 깊게 얘기한다. 스페인 여인들은 대개 자그만 체구에 검은 머리인데, “열정이 돋는 눈이 검은 망사 속으로 어슷하게 비쳐 보이는 미(美)란 참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라 했다. 나는 실제로는 아니고, 고야의 그림에서 그렇게 검은 망사를 쓴 여인을 본 적은 있다.

 

고야의 <도나 이사벨의 초상>, 영국 국립미술관에서


덧붙여 나혜석은  일찍이 스페인 여자는 “반드시 사랑의 복수를 하고야 말며 그 불과 같은 열정은 유럽 다른 여자들에 비할 데 아니라는 말을 들었던 바라, 더욱 유심히 아니 볼 수 없었다.”라고 한다. 


그런데 나혜석이야말로, 결혼 당시 신혼여행을 대신하여 남편과 함께 저 한반도의 남쪽 바다 끝 자신의 옛 애인의 묘지를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온 걸 보면, 스페인 여자들 못지않은 열정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아카시아 삼림 위에는 쪽빛 색 강한 광선이 쪼이고 거기에 흰색의 석조 건축물, 그리고 파초가 너즈러진 가운데 여신의 동상이 곳곳에 있고 기염 차게 토하는 분수가에는 웃통 벗은 노동자와 어린아이들이 한참 무르녹은 멜론을 벗겨 들고 앉아 맛있게 먹고” 있어, 스페인은 원시적 기분이 많고 유럽 중에는 보지 못하던 동양적 색채가 충만하다고 기술한다. 


말라가에서


비단 나혜석뿐만 아니라 나와 스페인을 여행을 함께 했던 아내도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달구며 올리브와 해바라기 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길을 달리면서, 당신과 함께 이런 곳을 차로 달려보는 것이 자신의 로망이었다면서 자못 흥분해했었다. 아내는 나혜석과 같은 예술가는 결코 아니지만, 유럽 여행 중 그 어떤 나라보다도 스페인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3.

 나혜석은 역시 화가다. 그녀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했음에도 프랑스 화가들에 대한 언급은 별로 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스페인을 여행하면서는 두 명의 화가에 주목한다. 그녀는 스페인 반도는 생기기가 소와 같은데, 지리적 이유로 여러 종류의 문명이 들어와 스페인 예술이 매우 다양해졌다고 본다. 


스페인의 그림은 “강하면서 영혼을 미혹케 하는데, 스페인 조상이 가졌던 원시적이고 신비하며 조금도 사기(邪氣)가 없는 기분과 환상을 현대적으로 창출해낸” 이가 고야라고 본다. 


그녀는 고야의 무덤을 직접 방문하고 여러 걸작들을 보면서 “예술에 대한 자신의 이상이 커지고 자기도 가능성이 있을 듯한 생각이 났다”면서, “자기 생애에 이 같은 감흥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고 한다. 한마디로 스페인의 고야는 나혜석에게 최고의 화가였다. 


프라도 미술관 앞의 고야의 동상


나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평생을 걸쳐서도 다 못 볼 만큼 많은 고야의 그림을 보았다. 문외한이기에 뭐라 말할 순 없지만 고야의 그림에는 ‘반골’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미술관을 나왔을 때 마드리드 왕궁 위 하늘로 거대하고 불안한 먹장구름이 번지며 바람이 세차게 불었는데, 바로 그건 고야의 그림이었다. 나중 다른 자리를 빌려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후일 나혜석의 일생도 그러했다.          

마드리드 왕궁 위의 먹장구름


나혜석은 마드리드에서 당일로 톨레도를 갔다 오기도 한다. 그녀는 톨레도에서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썼다는 다 쓰러져가는 집도 두른다. 그녀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에서 고야보다 200년 앞서 활동했던 화가 엘 그레코를 만난다. 


그레코는 원래 그리스 사람으로 이탈리아를 거쳐 스페인으로 와 톨레도가 제2의 고향이 된 사람이다. 그레코는 그리스와 이탈리아, 스페인이라는 지중해의 세 문화가 혼종이 된 소위 다문화(?) 화가다.  


그는 스페인의 옛 수도였던 톨레도에서 추기경, 기사들, 귀족, 부유한 상인 등 다양한 계층과 교류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 미술세계를 창조해간다. 위아래로 쭉쭉 늘어지고 볼품없어 보이는 예수를 그린 엘 그레코의 그림을 보노라면 그가 종교 시대가 아닌. 초현실주의의 시대를 살았던 화가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미술사가들은 벨라스케스, 고야, 피카소, 미로, 달리로 이어지는 스페인 회화사를 장식하는 천재 화가들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그레코의 파격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실제로 그레코는 20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나혜석 역시 세계 각국 사람들이 스페인의 미술을 찾아올 때는 반드시 이곳에 들러 그레코의 독특한 필법을 보고 혹 배워가는 자의 숫자가 최근 들어 매해 증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레코의 <십자가형과 두 명의 기부자>, 영국 국립박물관에서


나혜석은 그레코도 그레코지만, 남청색 하늘 뜨거운 볕 아래 흙을 밟으며 돌아올 때 멀리 보이는 톨레도의 고성은 그리스의 건물 같고, 푸르게 흐르는 물 좌우편에는 무슨 식인지 이상스러운 토벽 문이 있는 근처의 정경들에 감탄하다. 


그리고 대성당들과 옛날 스페인을 지배한 아랍인들이 살았다는 600년 된 집들의 정경에도…. 오후 7시 차를 타고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가는 나혜석은 그 하루가 얼마나 유쾌했던가 하며 행복해한다.  


아마도 그녀의 말대로 파리 또는 유럽에서 나혜석은 “어머니와 아내가 아닌 어린애가 되고, 처녀가 되고, 사람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으리라.  


톨레도 골목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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