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스칸디나비아 삼국 중 정작 스웨덴은 가보지를 못했다. 대신 그 옆 나라인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를 관광할 때였다. 오슬로는 작은 도시이기에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시내의 중앙역 인근을 적당이 거닐고 있었는데 오슬로 시청이 금방 눈에 들어왔고 그 옆에는 뜻밖에도 노벨 평화센터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벨상은 잘 알다시피 스웨덴 출신의 기업가이자 발명가인 노벨의 유언으로 만들어진 상이다. 그럼에도 노벨상의 다른 부문들과 달리 유독 평화상만큼은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수상식도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다. 왜 그렇게 됐는지의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고 그저 노벨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시상식이 열리는 오슬로 시청의 그레이트 홀에는 노르웨이의 풍광과 역사를 담은 풍성한 색채의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청사 안에는 우리나라의 평화상 수상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기부한 거북선 모형이 있다는데 정작 확인하지는 못했다. 노벨 평화센터 역시 들어갔다 나왔는지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뭐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던 것 같다.
이곳을 구경한 후 오슬로 시청과 북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케르후스 요새라는 곳에 올라가 잠시 쉬었다. 그 요새 초입에는 미국의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거대한 동상이 있었다. 왜 하필 이 양반의 동상이 여기에 세워졌을까 생각했는데, 아마도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저항한 노르웨이를 그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노벨 평화상은 그 정치적 특성 때문에 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동일한 성을 가진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1906년 러일전쟁을 종식시키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왔다는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그 내막을 살펴보면 우리로서는 상당히 분개할 일이 있다.
1905년 7월 미국은 러일전쟁서 승리한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양해하면서, 자신은 일본으로부터 필리핀 지배를 승인받는 태프트-가쓰라 협정을 맺는다. 즉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은 것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불가분의 일로, 이는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휘로 미일 간에 이뤄진 부당거래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2.
노벨 문학상은 이런 평화상에 비하면 정치색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도 그로부터 아주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닥터 지바고>의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한참 동서 냉전시기였던 195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당시 노벨위원회의 결정은 그의 수상을 반공·반소(련) 선전에 이용하려던 미국의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확실한 건 미국 CIA가 <닥터 지바고>의 서방 출간을 도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해 노벨 문학상 수상 발표가 있을 때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학수고대한다. 우리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한 염원은 일찍이 근대문학 초창기부터 시작된다. 이광수는 1917년 <문학이란 하오>라는 글에서 문학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하던 끝에, 막판에 가서는 우리도 이제는 노벨 문학상을 타야 되지 않겠는가를 주장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이광수가 노벨 문학상 이야기를 꺼내게 된 데에는 1913년 비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인도의 타골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타고르의 수상 소식은 동아시아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는데, 최남선이 발간하는 잡지 <청춘>에 타고르의 사진과 시가 소개되면서 타고르는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주목받는 외국의 문학가가 된다.
이광수도 그런 타고르의 명성을 듣고 노벨상 수상의 염원을 피력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노벨상을 수상하면 우리 문학의 성가를 높이는 것 말고도 노벨 상금을 타서 부를 누리게도 되니 이 얼마나 일석이조의 일이 아니겠는가를 강조한다. 우리 어린 시절 도서관에 가면 책 속에 부귀와 영화 심지어는 미인도 있다는 통속적인 독서 표어가 있었는데 이광수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한 셈이다.
이광수는 이에 앞서 우리의 고전문학은 모조리 사대주의적이고 봉건적인 것들뿐이어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며 우리 문학의 과거를 전면으로 부정한다. 따라서 우리 문학은 당연히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구문학을 근대문학의 전범으로 삼아야 한다며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를 위대한 문학의 표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이광수의 서구 문학을 향한 ‘문화적 식민주의’가, 끝에 가서는 노벨상 수상에의 염원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문제를 떠나 ‘모든 상은 불행을 초래하는 악마의 발명품’이라는 보들레르의 말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내 개인적으론 상을 갖고 예술가들의 서열을 정하고 위계화하는 것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살생과 파괴의 수단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돈을 번 노벨의 죄도 크지만, 세계의 인재들을 서열화하는 노벨상을 만든 것은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통렬히 야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