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뤼셀 공항에 도착하면 초콜릿과 중세 도시 브뤼헤를 선전하는 대형 포스터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당연히 벨기에 여행서 초콜릿은 많이 먹고 다녔지만, 막상 브뤼헤는 시간이 없어 두르지를 못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브뤼셀에서 기차로 잠깐 다녀올 수 있는 갠트를 갔다 왔다.
15세기경 갠트는,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 지역에서 브뤼헤, 앤트워프와 함께 어깨를 겨루며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도시였다. 갠트 역에 내리면 트램을 타고 올드 타운으로 가게 되는데, 올드 타운의 운하는 마치 암스테르담 등과 같은 도시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트램이 지나가는 운하 위의 목조 다리는 자못 낭만적이다.
그런데 갠트에서 정작 놀랐던 것은, 브뤼셀 거리는 거의 불어 간판들이었는데, 브뤼셀에서 기차로 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갠트는 공용어가 네덜란드 방언인 플레미시 언어로 싹 바뀐다는 점이었다. 독일어를 조금 공부했던 나로서는 이 언어가 오히려 불어보다는 친근했는데, 첨에는 그 언어가 독일어 철자를 잘못 써놓은 건 아닌지 오해할 정도였다.
벨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어권으로 남북이 갈라져 있는데, 네덜란드 방언을 쓰는 북쪽의 플랑드르, 불어 방언을 쓰는 남쪽의 왈롱 지역이 그것이다. 그러나 수도 브뤼셀은 갠트와 가까이 북쪽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인구의 대부분이 불어를 쓴다.
벨기에는 이 때문에 예전에는 언어 문제로 크고 작은 갈등들이 많이 있었나 보다. 벨기에가 이렇게 여러 공용어를 쓰게 된 배경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강자 틈 사이에 껴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2.
벨기에는 1830년 네덜란드로부터 비로소 독립했지만 그 이후에도 자주 강대국의 희생양이 된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 벨기에를 거쳐 가면서 벨기에는 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운명을 겪는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을 때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는 영웅적으로 맞섰다. 그러나 딱 한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전투에서 패한다. 그 딱 한 번을 이긴 전투가 이제르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벨기에군은 이제르 강으로 몰려온 독일군을 강의 수문을 열어 수몰시킨다.
그 결과 인근의 40km가 대전 기간 내내 수몰됐고, 벨기에는 그 뒤편에 자리 잡고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독일에 항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독가스를 처음 사용했다는 이 전투 이래 1차 세계대전은, 과거의 전쟁과는 달리 지구전의 양상을 띠게 되고 그 오랜 전쟁 기간 동안 벨기에는 독일에게 엄청나게 시달린다.
3.
1차 대전에서 죽은 군인의 수는 9백만이고 일반인 부상자 수는 2천만이나 된다고 한다. 1차 대전은 유럽 전체를 뒤덮은 엄청난 재앙이었다. 전쟁의 대부분이 머나먼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이 전쟁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나 그밖에 일본 신문을 읽고 전장의 참상을 알게 되는데, 당시 이 전쟁에 대한 신문의 보도방식이 사진 등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독자들에게 막연히 인식됐던 ‘전쟁’과 ‘유럽’이라는 존재가 실감 있게 다가온다.
특히 약소민족인 우리 처지에서는, 중립국 벨기에가 침공당한 사건은 동병상련을 불러일으켰다. 벨기에 망명정부를 위한 모금운동에 동정을 표하고, 전사한 벨기에 병사를 애도하는 시를 짓기도 한다. 시인 최소월(승구)이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 잡지인 <학지광>(1915년 2월호)에 발표한 <뻴지엄(벨지움)의 용사>가 바로 그것이다.
산악이라도 뻐개지는
대포의 탄알에
너의 정강이는
벌써 쇄골이 됐고
야수보다도 포악한
게르만의 전사에게
사랑하는 처는
치욕으로 죽었다.
(…)
뻴지엄의 용사여!
최후까지 싸울 뿐이다!
너의 옆에
부러진 창이 그저 있다
뻴지엄의 용사여!
뻴지엄은 너의 것이다!
네 것이면
꽉 잡어라!
(…)
이 시를 쓴 최소월은 주요한, 김억과 더불어 191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나혜석의 연인이기도 했던 그는 1916년 25세의 나이에 폐병으로 요절한다. 당시 나혜석의 나이는 21세였다. 나혜석은 그 후 총독부 관리와 결혼하는데 신혼여행을 대신해 남편과 함께 최소월의 묘지를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왔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다.
4.
벨기에는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약자로 시달렸지만, 19세기 후반 유럽 바깥에서는 자신의 국토의 80배에 달하는 아프리카 콩고를 해외 식민지로 얻어냈다. 벨기에는 콩고에서 초콜릿의 원료가 되는 카카오를 거의 공짜로 가져오다시피 하며 초콜릿 나라로 부상하게 된다.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는, 콩고의 고무농장서 강제노동을 거부하는 원주민의 손목을 잘라내는 잔혹한 행위를 한 이로도 유명했는데, 그렇게 해서 얻어낸 부로 과시적인 건축 사업에 몰두한다. 지금 브뤼셀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그때 지어진 것들이다.
벨기에의 초콜릿과 브뤼셀의 아름다운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은 식민지 수탈의 소산이니, 최소월과 같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벨기에의 제국주의적 면모까지 헤아려 보기에는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