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같이 나이가 좀 있는 이들은 일본 여행을 아주 좋아한다. 뭣보다도 가까워서 좋고, 어디를 가도 깨끗하고 또 음식이 입에 맞는다. 금상첨화인 건 곳곳에 온천지가 있어 여독을 푸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이다.
온천지가 많다는 건 한편으론 일본 열도가 지진과 화산 활동이 활발한 세계 최대의 화산대에 놓여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든 증기를 내뿜는 화산 분화구를 쉽게 볼 수 있고, 수많은 분출구와 분기공에서 물이 거품을 내며 끓어오르는 온천 마을은 화재 끝의 피어오르는 연기와도 같은 수증기로 뒤덮여 있기 십상이다.
이러한 온천지는 ‘지옥’ 또는 ‘불지옥’이니 ‘해지옥’이니 하는 별명이 붙어 있어 신기한 구경거리가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지진의 발생은 공포의 대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에 가서 산 것도 아니고 몇 차례 그것도 며칠 관광을 하고 온 것이 전부인데, 그 잠깐 중의 여행 기간 중에도 지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코리아타운이 있는 도쿄의 신오쿠보 역 인근의 숙소에서 자는데 새벽에 리히터 규모 5.4의 지진이 일어났다.
그날 뉴스를 들으니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일부 교통이 두절됐다고 한다. 나는 탱크 굴러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다미방과 기둥이 흔들려 놀라서 깼다. 숙소에서는 지진 감지기가 작동하면서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일시적으로 난방 물 공급이 끊기기도 했다.
지진이 잦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지진이라면 무조건 겁을 낸다고 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지진이 있을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앞으로도 자주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그날 신주쿠 역에서 기차를 타고 에노시마 바닷가를 관광 갔었다. 그날따라 비바람이 불면서 파도가 거세게 일었다. 해안가에 위치한 쓰나마 발생 시의 대피소를 보니 섬찟한 느낌마저 들었다.
2.
식민지 시기인 1923년 일본 중부를 덮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다. 목조주택이 밀집돼있는 지역서 뒤집어진 난로로 화재가 발생한다. 그런데 불이 방화로 발생했다는 소문, 급진주의자들과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대학살이 자행되고, 6천 명의 조선인들과 조선인으로 오인된 사람들,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자경단원에게 살해된다.
지금도 일본인 사회에서는 재일 한국인 대부분이 지하조직과 연결돼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평상시의 혐오와 차별의식은 사회적 상황이 불안해질 때 광기의 폭력으로 전화되기 쉽다. 내가 묵었던 신오쿠보의 코리아타운은 최근 격화되는 일본 우익의 혐오 시위로 그 상권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으로 유학 간 식민지 문인들은 대거 귀국을 서두른다. 그들의 귀국은 재난을 피해 단순히 고국으로 돌아온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학 세계 안에서도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그중에서도 1920년대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이상화와 김소월의 시 세계의 변화가 주목할 만하다.
3.
이상화는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로 건너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다 관동대지진을 만나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귀국을 하게 된다. 이상화는 공교롭게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1923년 9월 <백조>지에 그의 유명한 시 <나의 침실로>가 발표된다.
이 시는 프랑스 유미주의 또는 퇴폐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마돈나를 향해 “수밀도의 가슴에 이슬이 맺히도록 달려오려무나.”라고 부르는 구절은, ‘발그레한 빛을 띤 풍만한 유방에 땀이 스며들도록 달려오라’는 의미의 비유로, 현재의 관점에서 봐도 아주 관능적이고 뛰어난 감각적 표현이다.
시의 화자는 마돈나를 데리고 외나무다리 건너 동굴로 도망치려 하나, 동굴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지도 못하고 더 이상 나갈 수도 없는 절망을 격렬히 노래한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과 비탄에 빠져있던 상화는 관동대지진을 겪고 귀국하면서 시 세계가 극적으로 변화한다.
그는 우선 <방백」>(1925)이라는 수필에서 자신의 시는 그동안 ‘독백’만을 해왔는데 이제는 민중들을 향해 ‘방백’을 해야 할 것임을 다짐한다. 그리고 “과거의 민중은 nothing이었고, 현재의 민중은 something일 뿐이나, 미래의 민중은 everything”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곤 곧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에서 동굴이 아니라, 손에 호미를 들고 봄이 온 조국의 들판으로 뛰쳐나온다. 이 시는 원래 <개벽>이라는 잡지에 실렸다가 통째로 압수됐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이 시가 살아남아 전해지는 것은, 잡지사가 검열 직전 일부 잡지를 믿을 만한 독자들에게 빼돌려 우송한 덕분이다.
김소월 역시 일본 도쿄 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나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한다. 그 이전의 김소월 시는, “죽지 못해 사는 인생” 또는 “칼날 우에 춤추는 인생”이라면서 극심한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
소월은 관동대지진 이후 귀국해서 1924~25년 사이에 <밭고랑 위에서>,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을 대일 땅이 있었다면> , <나무리벌 노래> , <옷과 밥과 자유> 등 이전과는 다른 성격의 시를 발표한다. 이 시들은 김소월의 절망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물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충이나마 짐작케 한다.
특히 뒤의 두 편의 시는, 실제 황해도 재령 지방 여물리(나무리벌)의 일본 동양척식 주식회사 농장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를 배경으로, 쟁의에 실패하면서 만주로 쫓겨 가게 된 370여 명 조선인 소작인의 비극을 노래한다.
소월은 이들 시에서 공중에 나는 새들조차 털이 있고 깃이 있어 먹고살 수 있는데, 우리의 농민들은 왜 그조차 누리지 못하고 초산, 적유령 국경 넘어 만주, 봉천 땅으로 떠나 살 수밖에 없는 지를 물으면서 사회적 모순을 고발한다.
이 시기 어느 시인도. 좌익 시인들조차도 이러한 이주 농민의 비극을 노래한 이가 없다. 그런데 ‘고향 타령’이나 하고 ‘울보 시인’인 줄 알았던 소월이 뜻밖에도 이를 그리고 있다. 관동대지진을 겪으면서 상화와 소월 두 시인은 식민지 시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