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9년 한국이 체코와 수교를 맺기 전까지, 체코는 북한과의 교류를 쭉 이어왔다. 특히 과거 체코는 동유럽 국가 중에서도 기계공업이 발달한 나라라서,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는 북한 노동자들이 연수생으로 많이 가있었고 또 체코에서 북한으로 발전소, 자동차, 전기와 관련된 여러 공작기계들이 제작, 납입됐었다.
나는 2014~15년에 프라하 카렐 대학교 한국학과의 방문학자로 연수를 가 있으면서 체코에 남겨진 과거 북한 사람들 특히 북한 문인들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50년대 당시 체코를 방문한 북한 문인들의 기행문도 있는데, 북한서 출간된 그들의 기행문을 그곳 도서관서 읽어 보았다.
60여 년 전 북한 문인들이 본 프라하의 모습이 내가 와있는 현재의 프라하와 비교해 어떨지 자못 궁금해하면서 읽었는데 그 내용에 적잖이 실망했다. 내용이 주로 사회주의 선진국가인 체코를 방문해 북한과 체코의 사회주의적 연대를 강조하는 것으로 일관되고 있으니 재미있을 턱이 없다.
특히 이기영은 그의 대표작 <고향>(1933년)에서 식민지 조선 농민의 모습을 아주 탁월한 솜씨로 그려내 기대가 자못 컸는데, 기행문은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해방 후 등장하여 활동했던 북한의 ‘계관시인’ 정문향의 체코 기행문도 읽어 보았는데 이것 역시 비슷한 수준이다.
2.
이기영은 195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족회의의 초청으로 체코를 방문한다. 평양서 프라하까지, 중간에 기상 상태 때문에 중국 하얼빈에서 이틀 정도를 지체한 것을 빼고도, 전체 2~3일 정도 걸려 간 것으로 보인다. 평양서 하얼빈을 경유해, 러시아 치타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고 모스크바서 다시 프라하 가는 비행기를 갈아탄다. 우리는 현재 서울-프라하 직항 노선으로 10시간 정도면 간다.
정문향의 경우는 작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57년 육로로, 다시 말하면 기차로 평양서 프라하까지 간다. 총 12일이 걸렸다. 평양서 신의주, 중국의 단동을 거쳐 만저우리 국경 역을 지나 시베리아를 횡단해 러시아 남부인 우크라이나로 내려가 슬로바키아 쪽 국경 역을 통해 프라하로 갔다.
정문향은 기차가 체코슬로바키아 땅으로 들어서자 “울창한 수림 속에 뾰족한 붉은 지붕들이 줄지어 늘어선 농촌 집의 선명한 색조가 그 무슨 공예품과도 같이 아름다운 인상을 준다.”라고 했는데, 이런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감자와 사탕무 수확이 한창인 밭들에는 트럭과 농기계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고 했는데, 당시 북한 사람들에게 체코의 농촌은 매우 선진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체코를 방문했을 당시 그곳의 농촌 풍경은 다소 퇴락한 모습이었다. 특히 체코와 국경을 하고 있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농촌들과 비교하면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이기영이 프라하를 방문한 시기는 5월 1일 노동절 행사가 이뤄지던 전후인데 그렇다면 이른바 ‘프라하의 봄’을 아름답게 표현할 법하기도 한데 노동절 행사에 참가한 체코 인민의 행진과 구호 소리가 아주 감명 깊었다는, 사회주의 국가의 문인다운 얘기를 하는데 그치고 있다.
정문향은 프라하를 각양각색의 건축미를 가진 도시로 마치 ‘건축 예술 전람회’를 보는 느낌이었다는 재밌는 표현을 한다. 그리고 하늘에는 수 백 개의 탑과 한꺼번에 솟은 지붕들이 연달아 보여 온다고 했다. 또 거리의 길들은 크지 않은 검은 돌을 깐 포석 도로로 돼있고, 인도에는 흰 돌과 검은 돌을 모아 맞춰 길바닥에 무늬를 냈는데, 똑 마치 비단길을 깐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정문향의 기행문 역시, 봉건 시기 왕들과 귀족에 저항해 민중 봉기를 이끈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은 프라하 궁성 밑 황금소로를 가면 카프카가 작품 집필을 위해 가끔씩 머물렀던, 그의 누이의 앙증맞은 파스텔 톤 집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반면 정문향은 이 황금소로의 집들이 프라하 궁성에서 궂은일을 하던 하층민들이 모여 살던 오막살이 단칸집들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누추한 집들이 있는 길을 누가 ‘황금소로’라는 이름을 붙여 조롱했는지를 꾸짖는다.
그리고 황금소로에 있는 지하 감옥소를 찾아서는, 16~17세기 체코 농민봉기의 지도자로 이곳에 갇혔던 ‘달리보르까’라는 이를 떠올리며 교회와 귀족이 통치하던 시대의 암흑상에 분노한다. 달리보르까는 모진 고문을 이겨내기 위해 옥중에서 바이올린을 배워 켜기도 했는데 그의 바이올린 소리가 감방 담벼락을 넘어 들려오기도 했다는 전설을 전하기도 한다.
프라하 올드타운 시계탑 광장의 한 복판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에 가서는, 후스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100년이나 앞질러 불을 붙인 체코의 종교개혁가임을 얘기하기보다는. 당대 체코 하층민들의 계급투쟁을 이끈 민족적 지도자였음을 강조한다.
3.
그런데 이들의 기행문에는 다소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다. 이기영은 여행 중 방문단과 함께 프라하 교외에 위치한 ‘김일성 학원’을 방문한다. 이 학원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전쟁고아들을 체코로 데려와 양육하기 위해 지어진 기관이다.
이기영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원아들이 떼를 지어 대표단에게 와 달려 붙어 꽃묶음을 전했다고 하는데 이기영은 이들의 환영에 감격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들이 얼마나 조국과 육친에 주리었는지를 생각한다.
이기영은 그들에게 붙들려 한참 진땀을 뺐다고 한다. 2층의 원아들의 침실을 두루 살피면서는 여학생들의 침실에 놓인 인형을 보며 애잔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틈틈이 이러한 전쟁고아를 탄생시킨 주범으로 “미제 야수”의 도발을 분개해 마지않는다.
전쟁고아들은 성년이 되면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게 돼있었나 보다. 정문향에 의하면 그곳 모스트 광산의 노동자들이, 김일성 학원을 졸업하고 그곳 광산의 기술 전문학교를 다니다 소환을 앞둔 전쟁고아들의 학업을 자기들이 책임지겠으니 계속 체코 땅에 머물게 해 달라는 연명 진정서를 제출했다는 이야기도 소개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도 많은 전쟁고아들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에 입양돼갔지만, 북한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던 셈이다. 단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성인이 되면 귀국시킨다는 조건을 달고 있었던 것 같다.
1989년 한국이 체코와 수교하면서 체코에 있던 북한 사람들은, 북베트남 사람들과 달리, 모두 남김없이 본국으로 소환된다. 내가 갔을 때는 북한 대사관만 남아 있었고 김정일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이 대사직을 수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