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20년대 후반 화가 나혜석이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금강산을 보지 못하고 조선을 말하지 못할 것이며, 닛코(日光)를 보지 못하고 일본의 자연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또 ‘소주(蘇州)나 항주(杭州)를 보지 못하고 중국을 말하지 못하리라는 것같이 스위스를 보지 못하고 유럽을 말하지 못 하리만치 유럽의 자연 경색을 대표하는 나라가 스위스다.”
스위스는 곧 알프스의 나라다. 유럽에서 ‘풍경화’라는 장르는 유럽인들이 알프스를 발견하면서 생겨났다는 얘기도 있다. 유럽 사람들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갈 수 있었을 때 이후에야 비로소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기들이 생활하는 일상적 풍경과는 전연 다른 경치를 보고서 비로소 ‘풍경’이라는 말을 붙이게 됐다는 것이다. 알프스의 자연은 웅장할 뿐 아니라 평화롭기도 한데 그것은 산자락 또는 기슭으로 펼쳐지는 전원적 풍경들 때문이다.
다시 나혜석의 말을 빌리자면, 스위스는 “사시사철 적설이 빙하가 되고, 빙하가 녹아 물로 되고, 물이 흘러 폭포로 떨어지고, 폭포가 내려 내가 되고, 냇물이 흘러 처처에 호수가 된다. 스위스에서 누구든지 구경을 나서거든 숙소를 정하지 말고 바랑 하나 짊어지고 나서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것이 스위스를 알기에 상책이다.”
스위스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융프라우와 아이거 등의 우람한 산봉우리들에 경탄을 보내기도 하지만, 여성 여행객들의 여행담을 들어보면 가끔은 산악열차에서 내려 들꽃과 목초지가 펼쳐진 산기슭을 내려오면서 황홀한 ‘힐링’의 체험을 했다는 얘기들을 자주 한다.
스위스는 이웃 나라인 독일과 비교해서 농작물을 키우는 땅은 거의 없고 대부분 가축의 양육을 위해 필요한 목초지만 있다. 융프라우를 올라가는 기차 연선 좌우 언덕은 솔로 씻은 듯이 잔디가 고르고, 군데군데 말뚝 박은 너머로 방목되는 소 떼가 움직일 때 울리는 워낭 소리들은 또 하나의 전원 음악이다.
서구문학의 전통에는 전원 문학 - ‘아르카디오 문학’이라는 장르가 있다. 그리스인들은 신화에서 전원적 이상향으로 아르카디아의 세계를 창조했는데, 전원 문학은 이상화된 자연을 배경으로 전원생활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원 문학에서는 목동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기도 해 이를 목가 문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요들송의 창법도 목동들이 양 떼를 부를 때 산골짜기로 울려 퍼지는 소리를 흉내 낸 발성법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스위스는 그런 아르카디오 문학을 연상시키는 곳이다.
아내와 나는 아이거 북벽 아래 있는 그린덴발트 마을의 숙소에서 머물렀는데, 숙소는 퇴비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농가들 사이에 있었다. 숙소 바깥엔 가문비와 포플러 나무가 울타리로 서있고 6월 하순임에도 밤에는 히터를 켜고 자야 할 정도로 산골이 깊었다.
나는 명색이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임에도 그때 가본 스위스의 풍광을 인상적으로 표현해낼 재주가 없다. 단지 나는 우리의 문학 속에서 스위스에서 본 것 못지않은 자연과 전원의 평화로움을 그린 시 한 편을 떠올려보고자 한다.
2.
80년대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당시 서울 시내의 D여고에는 야간부가 있었다. 신학기인 3월 이 학교 국어 선생님 한 분이 갑자기 그만두게 돼, 새 선생님을 구할 때까지 잠시 수업을 맡게 된 적이 있다. 당시 야간부 학생들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주경야독’하는 학생들, 아니면 고입 선발시험인 연합고사 인문계열에 응시해 떨어져 들어온 학생들이 대다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의기소침해 있었고, 수업시간엔 졸고 있거나 딴짓들을 하고 있기가 일쑤였다. 학생부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마치 불량소녀 대하듯 다소 거칠게 대했다. 당시 내가 가르쳐야 하는 단원은 운 좋게도(?) 한국 현대시 감상이었다. 아마도 첫 수업이 신석정의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1932)였을 것이다.
나는 수업을 시작하면서 ‘스위스’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으로 가보자고 얘기했던 것 같다.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돌면/고요한 호수 위에 흰 물새 날고/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를 설명할 때는, 칠판에다 이 정경을 그림으로 그려봤다.
그림은 엉성하기 짝이 없으나 시가 워낙 좋으니 다 용서가 된다. “산비탈 넌즈시 타고나려 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있는 구절에선 저런 양지 밭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면 좋겠다고 했다.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시렵니까?”의 구절에선 꿀벌이 잉잉거려 더 짙어진 사과 향내를 맡아보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학생들과 함께 시 낭송도 했는데, 내 평생의 수업을 통해 당시 그 야간부 여학생들 같은 행복한 표정을 보았던 예도 없었던 것 같다.
학생들의 삶이 힘들고 팍팍했음에도 이 시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됐던 듯싶다. 아주 잠깐의 기간이었지만 학생들에게 감사의 편지도 받았고, 개중엔 내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를 아쉬워(?)하는 학생도 있었다.
3.
신석정은 식민지 시기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시적 출발을 했다. “하늘이 저렇게 옥같이 푸른 날엔”, “먼 강을 바라보고 앉은 대로 화석이 되고 싶다”(<화석이 되고 싶어>)는 시는 단순한 전원시를 넘어 어떤 기개까지 엿보인다. 그의 시들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자연이란 평화로운 세계로 안주해 들어가 있어서만은 아닌 것 같다.
정지용이 지극히 폐쇄적인 시대 상황에서 절제된 아름다운 언어로 예술가로서 최소한의 자기를 지키려 했듯이, 신석정은 아름다운 자연, 전원과의 친화를 통해 먼 곳으로 이상을 추구하면서 어두운 시대를 넘고자 했던 것 같다.
신석정이 전라도 부안에 파묻혀 살면서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당시의 정치적 혼란, 그리고 이승만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도 늘 올곧은 처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불의의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의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의 세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신석정의 전원시들은 적어도 우리에게만큼은 스위스의 전원이 결코 가져다줄 수 없는 시대적 감동이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