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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Jan 16. 2022

산토리니와 이효석 문학 속의 ‘당나귀’

1.

최근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상영되는 한 미디어 아티스트의 신작 동영상 <동물원>을 관람했다. 그 영상은 공교롭게도 과천 미술관 바로 옆에 위치한 동물원과 놀이공원, 그리고 경마장을 무대로 하고 있다.   


공허하고 처량한 눈동자의 말들, 삑삑거리는 기계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놀이공원의 회전목마. 관중들의 아우성 속에 질주하는 경주마들의 영상이 아주 스산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동물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충 짐작이 되는 바, 인간의 관점에서 또는 인간의 탐욕으로 대상화돼, 생명성을 박탈당한 동물들의 모습일 것이다. 


화면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놀이공원의 리프트 카, 과천 주변 산 위의 송전탑, 고층 아파트들은 동물들을 전적인 타자로 간주하는 인간 중심 또는 개발 중심의 시선을 상징한다.  


영상 속 음악은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을 맡은 이가 제작했다고 하는데, 그 음악은 물신적 자본주의 사회의 공포와 비슷하게, 갇힌 동물들의 상황을 일층 공포감 있게 드러내 주고 있다.    

 


2.

이 영상 작품을 보면서 문득 그리스 산토리니 섬을 여행 갔을 때 마주친 당나귀들이 생각났다. 이 당나귀들은 관광 성수기에는 배에서 내린 관광객들을 태우고 섬의 언덕을 오르내리나 보다. 내가 갔을 당시는 비수기라서 당나귀들은 사람 대신 건축자재들을 싣고 숙박업소의 개보수 공사를 위해 힘겹게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산토리니의 아름다운 바다와 석양의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당나귀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섬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가며 여기저기 똥을 퍼질러 놓고 있어 당나귀의 고달픔과 힘듦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당나귀가 몸집에 비해 힘이 세, 인간을 태우거나 짐을 싣고 다녀야 하는 팔자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동물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아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런 당나귀의 운명에 연민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싶다.   


이효석 문학에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강원도 산골과 그곳의 사람들, 그리고 때때로 당나귀와 같은 동물들이 등장한다. 


이효석은 이들 즉 자연과 사람, 동물들을 원초적인 모습으로 아름답게 그리지만, 늘 이들의 관점이 아닌 경성제대 영문과를 나온 지식인의 관점에서 이들을 타자화 또는 대상화한다.



3.

<메밀꽃 필 무렵>에는 장돌뱅이 허생원과 이십 년의 세월을 같이 해온 당나귀가 등장한다. 가스러진 목뒤털, ‘개진개진’ 젖은 눈, 몽당비처럼 짧게 쓸린 꼬리,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으나 피가 새 나오는 굽을 단 당나귀! 이는 다름 아닌 고달픈 장돌뱅이 허생원의 초상이다.  

   

허생원은, 장에 매 놓은 이 늙은 당나귀가 ‘암샘’을 하여 온통 흙을 차고 거품을 흘려대며 암놈에게 달려들어 어린애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술집 여자를 사이에 두고 아들인지도 모를 젊은 동이와 실랑이를 벌이는 자신의 모습을 쓸쓸히 자조적으로 바라본다.     


어찌 보면 이효석은 순박하고 원시적인 산골 인간과 당나귀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지만 여인을 사이에 두고 아들과 경쟁하는 아버지, 이를 발정 난 당나귀의 모습과 겹쳐 그리면서 허생원이든 당나귀든 다소 야만적이고 윤리의식이 부재하는 미개한 것들로 대상화한다.


이는 마치 서구 사람들이 동양을 미개한 풍속, 원시성, 성적 욕망들이 섞여 있는 나름 매혹적이지만 열등한 것으로 대상화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효석 소설 곳곳에서 돼지나 들개가 교미하는 장면을 통해 인간들이 충동적 애욕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러한 예다.


지식인 작가로서 이효석의 태도가 절정에 이르는 장면은 역시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인 당나귀에 짐을 싣고 봉평 장에서 대화 장으로 넘어가는 메밀꽃 핀 밤의 산길이다. 


작품 초반에는 그나마 허생원과 당나귀의 고달픈 삶이 엿보이지만 이 산길 장면에서는 그러한 고달픔은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마치 허생원은 유럽 중세 시대의 음유시인과 같이 메밀꽃 핀 환상의 달밤을 당나귀와 더불어 유유자적 음미하면서 간다.  


<메밀꽃 필 무렵>은 낭만적인 소설이기는 하지만 고달픈 식민지 조선인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소설이다. 식민지 제국대학에서 서양문학을 공부한 지식인 이효석이 산골 별장에 잠시 쉬러 왔다가, 들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는 강원도의 산골이자, 산골 사람들이자, 당나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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