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등학교 6학년 때 사회 시간에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돼있을 뿐 아니라, 수도인 베를린도 동독과 서독 지역으로 나눠 있다는 사실을 배웠을 때 처음에는 선생님이 지어내서 하는 얘기인 줄로 알았다.
우리의 경우로 이를 것 같으면 평양이라는 도시가 북한과 남한 지역으로 나눠져 있다는 얘기인데, 그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평양에 거주하는 남한 사람들은 서울을 올 때 어떤 방법으로 오고 간단 말인가?
나중에 알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옛날 서베를린에 사는 우리 교민들은, 그곳에서 한국을 오기 위해 서독으로 나올 때 동독 안의 지정된 세 개의 고속도로를 통해서만 오고 갔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 때, 조작된 일면이 있기는 하지만,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그냥 터졌던 게 아니다.
현재 베를린 시를 관광하면 도시 곳곳에 옛 분단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베를린 포츠담 지역의 한 호텔에 머물 때, 숙소 바로 건너편은 과거에 동베를린이었던 지역인데 지금은 우범지구로 변했으니 밤에는 그쪽으로 외출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었다.
포츠담 말고도 찰리 검문소, 브란덴부르크 문 등 도처에 분단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베를린을 나눴던 전체 45km의 콘크리트 장벽 중, 슈프레 강을 끼고 1.3km만의 장벽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 장벽은 지금은 백 개가 넘는 벽화로 꾸며져 예술적인 야외 갤러리로 거듭나 있다.
독일의 통일이 1989년에 이뤄졌으니, 이 장벽이 무너진 지도 이미 30년이 훌쩍 넘었다.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하자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무너진 진짜 이유는 장벽이 무너졌다는 오보가 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든 탓에 장벽이 정말로 무너졌고, 겁을 먹은 국경수비대는 사람들이 장벽을 넘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얘기가 의미하는 것은 장벽이 어떻게 무너졌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독일은 이미 통일로 가는 제반의 여건이 성숙돼있었다는 사실이다.
2.
이에 비해 우리의 분단 상황은 여전히 엄혹하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시작된 남북의 분단은 처음에는 단순하게 ‘지리적 분단’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1946년 북한이 전면적 토지개혁을 실시,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면서 남북은 ‘사회적 분단’ 상태로 넘어간다.
1948년에는 남과 북이 각각 자신의 정부를 수립하면서 그것이 ‘정치적 분단’으로 넘어가는데 거기까지는 독일과 한국의 상황이 비슷했다. 그런데 남북이 이후 삼 년간의 혹독한 내전을 치르면서 독일과는 다르게 ‘민족적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에 이르게 된다.
독일이나 한국의 분단이 이차대전 이후 전개된 세계 냉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유럽의 냉전이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을 띤 것과 달리 동아시아의 한국이나 베트남은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치르면서 화해와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3.
나는 우리의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치유와 화해는 사회‧정치적으로가 아니라 민족의 공통된 정서와 감정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적 구호만 일삼던 북한 소설도 1990년대 이후 이러한 점을 의식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림종상의 <쇠찌르레기>(1990년)다.
이 작품은 남북으로 갈라진 유명한 조류학자 가문의 실화를 소재로 한다. 이 소설의 내레이터(화자) 원창운은 북한에서 활동하는 조류학자인데, 그의 할아버지 원흥길 역시 세계적 명성을 떨친 북한의 생물학 박사다.
원흥길 박사가 1947년 국제 학계에 소개한 ‘쇠찌르레기’ 새는 자바 군도 쪽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한반도를 거쳐 만주를 지나 시베리아에서 번식하는 철새로서 원래 ‘시베리아 쇠찌르레기’로 명명되어 왔다.
그런데 원 박사는, 그 새가 우리나라 동해안 지방에 서식한다는 사실을 밝혀, ‘시베리아 쇠찌르레기’를 ‘북조선 쇠찌르레기’로 고쳐 짓고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국제 조류학계의 공인을 받는다.
그 해 원 박사의 세 아들은 의사가 되고, 대학에 입학하는 등 집안의 경사까지 겹친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도 잠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세 아들 모두가 월남하고 원 박사는 그들이 두고 간 며느리와 손주들만을 고스란히 떠맡게 되는 비운을 맞는다.
이후 이들 부자가 이별한 지 20여 년 되는 어느 해, 조류 연구실 연구사로 있던 원 박사의 손자 창훈이, 평양 모란봉에 걸어 놓은 인공 새둥지에 날아든 새를 관찰하던 중 뜻밖에도 발목에 알루미늄 표식 가락지를 낀 한 마리의 ‘북조선 쇠찌르레기’를 발견한다.
이 가락지에는 일본 농림성의 이름이 새겨 있었다. 창운은 “그렇다면 일본에서 쇠찌르레기가 새로 발견됐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할아버지의 과학적 업적에 속하는 이 새의 이름이 바뀌어야 한다는 현실 앞에 당황해했다. 그러나 원 박사는 오히려 학문적 설렘을 감추지 못하며 일본 농림성에 이를 알아보았다.
일본에서는 이 새를 날려 보낸 적이 없고 대신 일제 가락지를 남한의 학자가 사용해 수원에서 그 새를 보낸 사실을 알려 주었다. 바로 그 사람은 월남한 원 박사의 막내아들 병후였다. 원 박사는 남한에도 이 새가 서식하게 된 사실과 이 새를 통해 알게 된 아들의 안부 때문에 가슴 벅차 한다.
그러나 기쁨도 순간 남한의 아들에게 편지마저 띄울 길이 없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한다. 결국 원 박사는 아들들을 만나지 못한 채 임종을 맞는데 그가 남긴 유언은 실상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전하는 것이다.
아내에게는 “자식들이 부모, 제 새끼를 버리고 달아난 것은 잘못한 짓이요. 그러나 그것은 외세로 인하여 나라의 분단이 빚어낸 비극이 아니겠소. 그러니 자식들이 돌아오면 반갑게 맞아주오.”라고 전한다.
이어 손자인 창운에게는, “우리 원 씨 가문은 조류가의 집안이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숲에 새가 욱실거리도록 만드는 것으로 나라를 떠받드는 기둥이 되어야 한다. 통일이 되는 날 너와 나 그리고 삼촌이 연구한 것을 합치면 그게 완성된 <조선 조류지>가 될 게다. 이것이 민족분단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한 우리 원 씨 가문의 3대가 통일의 제단에 올릴 가장 귀한 선물이 되지 않겠느냐”라고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