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식민지 시절 비엔나로 유학을 가서 고고학(인류학)을 공부한 한흥수(1909~?)라는 이가 있다. 그가 유학할 당시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는 바람에 박사학위는 스위스 대학으로 옮겨가서 받았다. 아마도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가 아닌가 싶다.
그는 비엔나로의 유학을 위해 1936년 조선을 떠났다. 오스트리아에 도착하고 이듬해인 1937년 『조선일보』에 「북구 종단기」라는 제목으로 기행문을 연재했는데 이는 비엔나로 가던 도중 주로 모스크바에서의 여행 기록을 담고 있다.
나는 2012년 러시아를 여행한 적이 있으니, 한흥수의 모스크바 여행과는 거의 8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여행을 한 셈이다. 한흥수는 1936년 7월 14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3박 4일을 머무는데 그가 모스크바에서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2. 따바리쉬!
한흥수가 8일 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와서 모스크바 역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6시였다. 그는 아침 식사를 위해 대합실을 겸한 식당을 찾는다. 대합실 정면에는 레닌 상이 있어 사회주의 국가가 된 러시아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식당에는 고급 메뉴는 없고, 단지 빵과 계란 우유, 차 등이 있어 손님들은 자신의 식탁에다 이들 음식을 날라다 먹는 방식이다. 종업원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노인이나 어린아이들에게나 서비스를 하는 모양이다.
대합실을 겸한 식당이라 식탁에서 자는 이들도 있어 자리가 모자라는 경우 종업원들이 깨워서 일어나 달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흥수가 거기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종업원이 말을 붙일 때는 누구에게든지 “따바리쉬(동지)”라고 부른다는 점이었다.
이는 손님이 종업원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고, 차창과 승객 간에도, 경찰과 시민 간에 또는 가게나 공장에서도 모두 그렇게 부르는 것에 놀란다. 심지어는 사병과 장교가 만나서도 경례하는 법이 없고 서로서로 “따바리쉬”라고만 부른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유교 나라에서 온 조선인이지만, 한흥수는 오히려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나리”, “영감”, “대감” 등 신분에 맞게 부르지 않으면 안 되는 조선의 생활보다 이러한 호칭의 간명 성이 통일된 생활의 반영임을 생각한다. 한흥수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반면 한흥수는 바르샤바를 거쳐 서유럽으로 들어가면서 비록 서양 말일 지언정 사람들에게 수시로 “실례합니다!”란 말을 쓰는 것이 꼭 가식과 허위의 언사 같다며 꽤 불편해한다. 그런 말을 쓰지 않으면 미개인 소리를 듣는다고 해 억지로 써야 되는 고충을 토로한다.
3. 반(反) 종교 박물관
한흥수는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모스크바를 잠깐 체류하는 시간에도 박물관을 집중적으로 찾는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20 여 개의 박물관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한 도시에 이 정도 숫자의 박물관을 가진 도시는 모스크바 정도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한흥수는 동경 유학 시절에 들었다고 한다.
그가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이름도 흥미로운 반종교 박물관(무신론 박물관)이다. 그 박물관은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 광장에 위치한 고딕식의 웅장한 건물이다. 원래는 ‘스트라스트노이 수도원’이라는 러시아 정교 사원이었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그 건물의 역할이 사원에서 반종교 시설로 백팔십도 바뀐 것이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면 원시시대의 저급한 씨족 종교로부터 출발해 각종의 미신이 발전하여 근세의 종교를 구성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과 종교가 사회에 미쳤던 영향 등을 놀라울 정도의 풍부한 자료와 과학적 설비를 갖춰놓고 설명하고 있다.
한흥수가 방문했던 이 박물관이 현재의 어느 곳인지를 구글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공교롭게도 이 건물은 한흥수가 방문한 이듬해인 1937년에 철거됐다. 스탈린 통치시기에 수난을 당한 또 하나의 전통적 종교 건축물인 셈이다.
그런데 이 수도원뿐이 아니다. 한흥수가 다음으로 찾은 박물관은 크렘린의 붉은 광장 남쪽에 있는 그 유명한 8개의 양파 모양의 지붕(쿠폴)을 한 바실리 사원이다. 이 사원도 스탈린 시기에는 박물관으로 사용됐나 보다.
바실리 사원은 러시아의 감수성으로 재탄생된 비잔틴 양식의 최고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받음에도 스탈린 시기에는 이 건물의 용도뿐만 아니라 그 건축물의 존폐 여부 또는 리모델링 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앞의 반종교 박물관 건물과 달리 해체의 운명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한흥수는 그런 점에 대해선 별 언급이 없고, 오히려 많은 박물관과 그것의 우수한 시설을 부러워할 뿐이다. 그리고 박물관 말고도 공공시설 예컨대 내부가 모두 눈부신 대리석으로 돼있고 미국의 지하철을 능가한다는 모스크바의 메트로 시설들에 놀라워한다.
4. 모스크바의 여인들
한흥수의 모스크바 기행문은 거의 박물관 이야기로 이뤄지고 있어 약간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사람들의 일상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을 하고 있다.
한흥수는 공원 벤치에 앉아 모스크바 시민들의 모습을 구경한다. 남자들의 옷차림은 대개 소박하고 노타이 차림인데, 특이한 건 여름에는 남자들이 머리를 빡빡 깎는다는 점이다.
그냥 머리털을 깎는 정도가 아니라 면도로 빡빡 밀어버리는데 이는 여름에 일광을 많이 받기 위해서란다. 현재도 머리를 민 러시아 마피아들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여인들은 대체로 화장들을 농후하게 하는 편이다. 물론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여인들은 예외다. 여자들은 건장하고 대형인데 한흥수가 특히 놀란 것은 상체 중 “유방이 거대해서 징글맞게 보인다는” 점이다. 나도 러시아 여인의 가슴을 볼 때 눈을 어데 두기 어려웠다.
그러나 곧 한흥수는 모스크바의 여인들은 각종 건축 노동에 이르기까지 힘드는 육체노동에 많이 종사하고 있으며 그러한 여인들도 하루 6시간의 노동(8시간이 아닌 6시간이다!)이 끝나면 공원으로 활기차게 밀려들 온다고 했다. 한흥수는 이러한 여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여인들도 산업현장에 적극 참여하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듯 싶었다.
5.
한흥수는 이 글을 이역만리 오스트리아서 써서 조선 땅에 보냈다. 원고가 어떤 경로를 거쳐 조선에 이르게 됐는지 자못 신기하다. 더불어 ‘그 먼 옛날에’ 이 글이 유럽에서 조선으로 오고 갔다는 사실에 나름의 감개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