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작품을 비평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사회문화(이데올로기) 비평이다. 사회문화 비평에 이론적 초석을 마련한 이가 마르크스다. 그래서 사회문화 비평을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라 바꿔 부르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경제학 비판>(1859)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의식이 (물질적)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명한 발언을 한다. 당연히 의식에 속한 문학 등의 예술은, 그것의 물질적 토대를 떠나서는 충분히 혹은 진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문학비평이라니 뜨악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마르크스는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와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원문으로 즐겨 읽었던 이다. 그의 딸들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마르크스가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셰익스피어를 한없이 읽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비평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절친’이었던 엥겔스를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엥겔스가 프랑스의 문호 발자크의 소설들을 얘기하면서 꺼내 든 ‘리얼리즘론’은 비평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상적 동지다. 엥겔스가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그 엄청난 이론적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엥겔스는 독일에서 방적공장을 운영하는 부르주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르크스 가족이 런던으로 망명했을 때, 엥겔스는 영국 맨체스터의 공장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마르크스의 생계를 뒷받침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비단 이런 경제적 뒷받침만을 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귀족 출신인 아내가 데려온 하녀와 관계해서 낳은 사생아를, 엥겔스가 자기 아이인 것처럼 꾸며 다른 노동자 가정의 양자로 보냈다는 얘기까지 있다.
마르크스가 관계한 하녀는 마르크스에게 “맨날 자본이 이러니 저러니 떠들지만 마시고, 한 번쯤은 자본을 좀 벌어보는 게 어때요!”라는 지청구도 줬다고 한다. 마르크스 아내는 생활인으로 무능했던 마르크스의 눈을 피해 바람을 피기도 했다고? 리얼리!?
언젠가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고향을 지나다가 그의 집에 들러 어머니에게 인사드리고 당신의 아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써서 크게 성공했다고 하자, 마르크스의 어머니는 “제 자본이나 잘 돌보지”라고 비아냥댔다는 말도 있다.
그럼에도 영국 BBC가 국내외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천 년간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압도적 1위를 차지한 게 마르크스, 2위는 아인슈타인, 3위는 뉴턴, 4위는 다윈이다.
사상가 마르크스의 뒤에는 사상적 동지이자 경제적 후원자였던 엥겔스가 있었고, 그 이면의 궁색하고 불완전했던 마르크스의 삶에도 엥겔스가 역시 같이 하고 있었던 셈이다.
2.
이러한 둘 사이의 관계 때문인지, 베를린 시를 관광하다 보면 베를린 돔 성당 근처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한 흥미로운 동상을 만나게 된다. 마르크스는 오른쪽에 앉아 있고 엥겔스는 왼쪽에 서 있는 청동 기념상이다.
동베를린 시절에는 그 기념상이 있는 곳을 마르크스 엥겔스 광장이라 불렀고 그 광장 한가운데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통일이 된 이후 독일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기념상은 고사하고 마르크스 동상조차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는데, 그나마 이곳의 2인조 동상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동상하면 광화문에 있는 ‘저 높은 곳’의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의 동상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2인조 동상은 바로 코앞에 놓여있어 가까이서 만져볼 수 있는 동상이라는 게, 제법 신선한 느낌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도 동상을 만지고 문질러 대서 청동상의 일부가 누런색으로 변한 부분도 있고, 심지어는 애들이 동상을 올라타고 숨바꼭질하는 광경도 보았다.
3.
동상 제작자는 두 사람의 성격을 잘 반영하여 만든 듯싶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 비해 다소 사납고 의지가 무척 강해 보인다. 이에 비해 엥겔스는 깔끔하고 상대적으로 감수성과 절도, 유머 감각이 있어 보인다.
엥겔스는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사태를 파악하는 감각이 신문기자 뺨칠 정도였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엥겔스가 항상 자기를 앞질러 간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추진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노로 사람들을 뒤흔들어놓는 능력이 있었다. 반면 엥겔스는 우리에게 항의나 투쟁을 선동하기보다는 오히려 결과를 낙관하면서 갈등을 해결하라고 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엥겔스는 훗날 “마르크스는 천재였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기껏해야 인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에드먼드 윌슨, 『핀란드 역으로』에서)
나는? 천재 마르크스보다는 유복한 부르주아지였지만 마르크스를 도왔던 엥겔스에게 더 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