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을 구경하노라면 어느 한 장소에 유독 많은 사람들이 머물거나 몰려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영락없이 고흐의 그림들이 전시된 곳이다. 프랑스보다도 오히려 미국 미술관이 더 그런 듯싶은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흐만큼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인상파 화가도 없는 것 같다.
우리 부부 역시 그런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고흐의 그림은 누구나 알고 있기에 이를 직접 만나봤다는 감격(?)에서 한참을 그 앞에 머물게 된다. 또 그의 그림이 감성적 파워도 강하고, 평생 한 장의 그림인가 밖에 팔지 못하고 고생 고생하다 죽었다는 비극적 삶 때문에 더 사람의 발길을 끄는 것 같다.
아내는 미술관의 그림들 중 정물화, 특히 화병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좋아한다. 고흐의 해바라기 정물화 역시 아주 좋아하는 그림들 중 하나다. 일단 해바라기는 꽃이 큼직하고 시원시원해서 좋다는데 스페인을 여행할 때에는 해바라기 밭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기도 했다.
아내가 해바라기 꽃을 좋아하는 것은, 조금 유식한 말을 빌리자면 ‘문화적 기억’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개마고원에서 평생 감자만 캐던 화전민이 고원에 지는 석양을 보고 아름답다는 감탄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감수성은 저절로 발달되는 것이 아니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난 이후 보리밭과 해바라기는, 이미 옛날에 자기가 보았던 보리밭과 해바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교육을 받거나 어떤 문화적 기억에 노출된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아내 역시 해바라기 꽃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시골 고향서 본 해바라기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고흐의 유명한 해바라기 그림을 본 문화적 기억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식민지 시기 조선 사람들에게 고흐가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함형수 시인의 「해바라기의 비명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이라는 시 역시 고흐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
「해바라기의 비명」의 화자는 자기가 죽고 난 이후 자신의 무덤 앞에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고,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줄 것을 부탁한다.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펼쳐진 보리밭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나가다 묘지의 해바라기를 보면, 그것을 태양같이 화려했던 자신의 사랑으로 기억해주길 바란다. 혹시 푸른 보리밭 사이로 종달새가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면, 비록 무덤 속에 있지만 아직도 날아오르려고 하는 자신의 꿈이려니 생각해달라고 한다.
이 시를 읽고 나면 나 역시 죽어서 저런 낭만적인 묘비 하나 세워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이 시가 고흐를 떠올리게 하는 건, 태양, 해바라기, 보리밭, 노고지리, 모두 고흐 그림의 노란색과 소용돌이치는 광경이 연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인 함형수도 고흐와 비슷한 생애를 살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함형수는 이 시를 1936년 서정주 등이 중심이 돼 결성한 동인지 『시인부락』의 창간호에 실었다. ‘시인부락’의 ‘부락’은 그냥 ‘마을’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일본에선 ‘부락’이라는 단어는 천민 또는 광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일컫는다.
서정주는 이십 대 시절 <방랑기>라는 글에서, 자신을 “쌍놈의 족속이다.”라며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주 위악적인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백석이나 윤동주 등은 시인을 “가난하고 쓸쓸한 슬픈 천명”을 갖고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또 달리, 시인부락의 시인들은 시인을 뭔가 박탈당하고 저주받은 운명을 갖고 태어난 자들로 생각한 것이다.
함형수의 행적은 그의 ‘절친’이었던 서정주에 의해 얼마간 알려져 있다. 함형수는 서정주와 함께 중앙 불교전문학교를 다니며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함형수는 웨이브가 곱게 지는 장발에, 오렌지 빛 양말을 바지 밑으로 잘 드러나게 신고 다녔다고 한다. 얼굴은 로스께(러시아) 트기 같은 이국적 생김새였다고 한다.
서정주가 성북동 그의 하숙집을 따라가면 그는 하모니카도 잘 불고 도리고의 세레나데도 즐겨 부르는 낭만적 청년이었다고 한다. 함경북도 경성(鏡城)이 고향인데,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했는데(아마도 사상범이었지 싶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유언서를 늘 양복저고리 한쪽 안 포켓에 밀봉해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함형수는 일제 말기에는 만주의 소학교로 가서 훈장 생활을 한다. 1945년 해방이 된 후 서울로 귀환하는 만원 열차의 지붕에 끼여 앉아 오다가 실족해 떨어져 죽었다고 서정주는 얘기한다. 그러니까 세간에 그가 고흐와 같이 정신착란을 앓다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3.
이렇게 놓고 보면 고흐와 함형수에게는 별 공통점이 없는 듯싶다. 단 고흐는 우울증과 정신착란 속에서 불안하고 고달픈 현실을 오로지 그림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함형수의 문우 서정주는 식민지의 어두운 현실을 저주받은 몸으로 부닥쳐보고자 했던 것 같다. “아름다운 배암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화사>에서)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일제 말에는 친일시도 쓰고 해방 후에는 그러한 폭발적인 정념도 수그러든다.
함형수는 그런 식으로 몸부림치지는 않았다. 해바라기와 그 사이로 난 보리밭을 보며 해바라기와 같은 정열을 꿈꾸고 보리밭 위를 노고지리처럼 비상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해방을 맞고 비명횡사하면서 짧은 청춘을 마쳤으니 이런 점에서 고흐의 비극적 생애와 비슷하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