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르웨이 오슬로를 관광할 때는 물가가 너무 비싸서 에어비엔비를 통해 숙소를 구했다. 당연히 집주인이 누군지는 알지 못하고 갔는데, 가서 보니 동거 중인 스무 살 동갑의 남녀가 주인장이었다. 환갑이 다 된 우리 동양인 부부는 우리 애들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린 북구의 젊은 커플과 함께 며칠을 같이 지내야 했다.
남자인 안드레아스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고, 베라는 이미 여대생이면서 아르바이트로 모델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신발장엔 그녀의 야한 하이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눈치를 보니 이들도 이 집을 렌트해서 사는데 여행객들에게 이를 다시 빌려줘 경제적 보탬을 얻고 있는 셈이다.
첫날은 우리 보고 편히 쉬라고 배려해서인지 둘이 새벽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다음 날은 늦게나마 들어오더니 남자가 우리를 위해 기타도 연주하고 우리나라의 보이 그룹 가수들을 물어보면서 한국에 대해 잘 아는 양 나름 손님 대접을 했다.
북유럽인 들은 성생활을 15~16살부터 시작하는 것을 “인체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맞다 ‘라고 한다. 우리의 젊은 집주인은 그런 기준에서 보면 한참을 지났다. 하기는 조선 시대의 춘향과 이몽룡 역시 그 나이에 첫날밤을 가졌으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현재 이 나라에는 결혼이 아닌 동거 관계의 형태로 같이 사는 남녀가 전 인구의 25%를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남자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여성의 혼전 정사 등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고, 사회복지도 잘 돼있어 미혼모가 되는 것이 그리 두려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오슬로 대학 한국학과의 박노자 선생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이러한 상황을 과거 바이킹 시대의 풍속에서도 그 연원을 따져본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이미 근대적 자유주의 또는 개인주의에 대해 상당히 앞선 생각을 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1814년 덴마크의 기반에서 벗어나는데,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 헌법보다 민주주의적 헌법을 가진 자주독립 국가로 출발한다. 가령 독립 당시 이미 노르웨이는 유럽 대륙에서 맨 처음 언론자유를 실행한 국가였다고 한다. 참고로 벨기에와 스위스가 그 뒤를 잇는다.
오슬로 대학과 국립 미술관이 함께 모여 있는 국립극장 앞을 가면 희곡 『인형의 집』(1879년)을 쓴 극작가 입센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입센은 인상만으로 볼 때는 다소 경직되고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어 그가 여성해방의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잘 와닿지가 않는다.
노르웨이어로 쓴 『인형의 집』은 발간 직후 곧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면서 전 유럽을 휩쓸며 노라 선풍을 일으킨다. 노라가 탄생한 지 10여 년이 지날 무렵인 1890년대부터 입센과 『인형의 집』은 유럽 대륙을 떠나 동아시아로도 건너오게 된다.
2.
우리나라에서 『인형의 집』은 이보다는 늦게 1921년 『인형의 가(家)』라는 제목으로 <매일신보>에 최초로 번역, 연재된다. 흥미롭게도 이 연재가 끝나는 마지막 회에는 우리나라 페미니즘 일 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나혜석이 지은 노래 가사가 악보와 함께 실려 있다.
4절로 이뤄진 가사 중 1절만 소개해보면,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기뻐하듯/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 인형으로/그들을 기쁘게 하는/위안물 되도다.//(후렴) 노라를 놓아라. …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인형의 집』은 1925년에는 연극으로도 공연되었고, 1933년 작가 채만식은 『인형의 집을 나와서』라는 제목으로 『인형의 집』을 패러디한 소설도 신문에 연재한다.
채만식의 『인형의 집을 나와서』는 어떤 면에서는 입센의 문제의식을 넘어선다. 채만식은 한 마디로 여성해방을 외치고 무턱대고 집을 나오면 뭐하냐는 것이다. 여성의 자유를 향한 바람은 결코 경제적인 문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집을 떠난 노라에게 남은 것은 도로 집으로 돌아가거나 계속 가다가 굶어주는 것 두 길밖에 없다. 채만식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깨달은 노라가 여성으로서의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얻기 위해 공장 노동자가 되는 것으로 작품이 끝난다.
3.
채만식의 작품은 당시 우리 문단의 우이를 잡고 있던 프로문학 쪽 여성 해방론의 영향을 받고 쓴 작품이다. 채만식의 주장은 일면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채만식 소설의 노라가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과정에서 결국은 운동권(?) 남성 노동자가 중요한 지도적 역할을 하는 등, 노라는 결코 주체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있다.
채만식은 오히려 대책 없이 집을 나온 여성들을 어리석게 보고, 여성해방을 비꼬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에 비해 입센의 원작은 노라가 집을 나온 사실 그 자체보다도 왜 그녀가 집을 나올 수밖에 없는지를 여성해방보다는 개인의 욕망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춰 그린다.
노라는 무대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다.
“당신들(노라의 아버지와 남편)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당신들은 나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이죠.”
“나는 우선적으로 당신(남편)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내게는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만큼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라는 거룩한 의무가 있어요.”
“나는 사회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밝힐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