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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기네스에 취해, 제임스 조이스의 모더니즘

by 양문규

1.

더블린에서는 기네스 맥주 공장의 박물관 스토아 하우스(storehouse)를 견학하러 갔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하면서 그곳을 가게 된 건, 그곳이 숙소에서 걸어서 갈 만했기 때문이다.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서울 같은 도시에 비하면 아주 작은 도시라 사실은 어디고 대충 걸어 다닐 수 있기는 하다.


이 기네스 박물관 견학의 마지막 과정은 기네스 드래프트를 따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흑맥주 기네스는 거품이 유난히 많고 독특해 맥주 애호가라면 그 거품까지 즐기면서 마실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기네스 드래프트.jpg 기네스 드래프트의 거대한 모형물
기네스.jpg 드래프트를 따르는 방법을 학습하고 있다.


그렇게 배워서(?) 따른 맥주를 그 건물 꼭대기 바에 올라가서 더블린 시를 내다보며 마시는 것으로 견학 코스가 끝난다. 술이 약한 데다 여독도 있고 이른바 낮술인지라, 한 잔 걸치고 나니 관광이고 뭐고 어디 가서 한숨 자고 가고 싶을 정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도 관광은 해야겠고 술도 깰 겸 강행을 해서 더블린을 관통하는 리피강 변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오코넬 다리를 건넜다. ‘알코올 검사기’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독 붉어진 얼굴로 더블린 시내를 갈지자걸음으로 걸어갔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더블리너들도 있었다.


리피강.jpg
시내1.jpg
시내2.jpg 리피강(상), 밝은 더블린(중), 우중충한 더블린


술 때문에 먼 풍경은 안 들어와도 길바닥을 보며 걷다 보니 오코넬 다리에서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동판이 눈에 들어왔다. 더블린 시내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1922)의 주인공이 걸어 다닌 장소임을 알리는 동판이 길바닥 곳곳에 100 여 개가 있다. 몇 개 더 봤자 그게 그거지만 어쨌든 본 건 그거 딱 한 개다.


동판.jpg 오코넬 다리의 제임스 조이스 동판


펍 가게들이 몰려있는 더블린의 강남 템플 바 지역으로 와서야 겨우 앉아서 쉴 수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펍은 19세기 말 스타일로 디자인된 전통 바인데, 벽에는 아일랜드 작가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역시 조이스도 있고,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무엘 베케트도 있었다.


또 펍 밖으로 나오니 노변 벤치에 앉아서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조이스의 동상이 있다. 더블린은 조이스 천지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는 “펍을 스치지 않고 더블린의 끝까지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구절이 나온다는데 기억에 없다.


템플 바.jpg 펍들이 몰려 있는 템플 바 거리. 사진의 한 시 방향에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조이스의 동상이 서 있는데 가려져 안 보인다.


난 아일랜드에는 작가 조이스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좀 전에 말한 베케트를 포함해, 다음 날 <작가 박물관>을 구경하니 이들 말고도 조나단 스위프트, 예이츠,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등이 아일랜드 출신 작가들이다.


아일랜드가 오랫동안 영국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대충 영국 작가로 알았던 듯싶다. 영국 식민주의가 아일랜드에 준 뜻밖의 선물이 영어라는 말이 있는데, 아일랜드는 유럽의 변방에 속했으나 세계문학의 지평을 새로이 연 작가들을 여럿 배출한다. 그중에도 제임스 조이스는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대표적 작가다.


cats.jpg 유네스코 지정 문학도시 더블린(좌), 더블린 작가 박물관


2.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읽었건만 그 내용이 기억에 거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는 내내 중간에 포기도 못하고 고문을 당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원래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자연과학을 전공한 교수 한 분이 참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 자존심 때문에 읽었다. 지금 그 양반을 만나면 진짜 재밌었냐고 꼭 묻고 싶다.


제임스 조이스는 1930년대 한국문학에서도 그 이름이 자주 오르내린다. 식민지 조선의 작가들은 조이스를 제대로 이해했을까? 이상은 조이스에 관심이 있었던 듯싶은데, 조이스와 비슷한 성향의 <날개> (1936)를 썼다.

그러나 그의 ‘절친’이었던 김유정은 <율리시즈>는 하품만 연발시키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 심리를 내공(內功)한다면서 결국은 산 사람을 유령으로 만들어 놓는 걸 자랑으로 삼는다고 했다. 예술의 목적은 전달인데 조이스 소설은 그렇지 못함을 비판한다.


박태원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5)은 조이스의 소설을 흉내 낸 것 같은데, 박태원은 그 작품 안에서 정색을 하고 조이스의 새로운 시험에는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나 그것이 새롭다는 점만 가지고 과중 평가를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3.

더블린 시를 기네스에 취해 걸었다고 했는데, 술을 마시면 몸이 부대끼기는 하지만 취하는 즐거움이 있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여기저기서 솟고 무의미하고 잡다한 생각이 흘러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가끔은 상상력과 의식이 고양되기도 한다. 물론 깨고 나면 말짱 꽝일 때가 많지만…


조이스가 새롭게 연 모더니즘 소설은 이전의 소설과는 달리 줄거리의 일관성이 없다. 아니 줄거리라고 할 게 아예 없다. 대신 우연하고 무의미한 사건들이 나열되고 그 사건들 사이사이로 내면의식을 빼곡히 채워나간다.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그 내면의식이 외부적 사건보다 더 중요하다.


모더니즘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문장의 형식적인 철도노선’을 뛰어넘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리얼리즘 작가들의 끔찍한 서사방식. 점심 식사 때부터 저녁 식사 때까지의 경과를 서술하는 것.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옳은 일도 아니다. 그저 관습일 뿐이다.”


그래서 나도 이제 퇴임도 했으니 제임스 조이스를 ‘혹시나’ 해서 다시 읽어보려고 하는데 ‘역시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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